예술과 상업의 경계에서 사회적 가치를 묻다
영국에서 촉망받는 스타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린 뒤 귀국한 권준호 디자이너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국내 디자인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접점에 놓인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탐구하며, 디자인이 어떻게 사회적 운동과 연결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찰한다. 권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무엇을 시각적으로 드러낼지 결정하는 선택의 책임을 지닌 존재라고 강조한다.
대학 시절부터 그는 디자인 기술보다 사회적 현안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08년 졸업 작품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었으며, 당시 대학의 실상을 폭로하는 서적을 제작해 교내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파급력을 깨닫고 깊이 몰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비주얼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며 탈북 여성의 삶을 다룬 ‘라이프’를 선보였고, 이 작업은 영국 ‘크리에이티브 리뷰’의 2011 올해의 스페셜 초이스에 선정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또한 런던 사치 갤러리의 ‘사치 뉴 센세이션 20인’에 이름을 올린 그는 반브룩 스튜디오와 와이낫 어소시에이츠 등 사회적 메시지를 중시하는 유명 스튜디오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일상의실천'을 통해 증명한 디자인의 역할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온 권 디자이너는 동료들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설립했다. 이 공동체는 디자인이 현대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그는 제주 강정마을, 세월호 및 이태원 참사 등 우리 사회의 아픔을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해 왔으며, 녹색연합이나 4·16재단 같은 시민단체의 다양한 기록물을 제작해 왔다. 최근에는 12·3 비상계엄 사태에 대응해 63개 팀과 함께한 ‘시대 정신’ 포스터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를 담은 ‘검은 벽돌의 기억’ 사진집을 완성하는 등 사회적 목소리를 시각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의 북디자인 여정 또한 능동적이었다.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저서 ‘소금꽃나무’를 읽고 감명받은 그는 후마니타스 출판사에 먼저 협업을 제안하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 ‘불온한 인권’ 등 굵직한 저작물들을 작업하며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다. 다만 비영리단체와의 협업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예산 제약으로 인해 디자인 권한이 제한되거나 과거의 보수적인 관행을 고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는 낡은 관점을 바꾸는 것 역시 디자인 운동의 일부라는 신념으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며 갈등을 조율해 왔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향한 디자인 철학
초기에는 비영리기관 중심의 작업이 많았으나, 현재는 공공 및 문화예술기관은 물론 대기업에서도 그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 3명으로 시작한 ‘일상의실천’은 이제 11명의 전문가가 함께하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규모가 커지는 과정에서 그는 재미와 의미, 그리고 경제적 수익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균형을 강조한다. 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만을 쫓아 생존을 위협받거나 돈만을 쫓아 가치를 잃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는 것이 스튜디오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내년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디자인총회’의 디자인 총책임을 맡아 로고 제작부터 웹사이트, 영상, 책자 등 행사 전반의 시각 정체성을 구축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거창한 포부보다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꾸준히 책임을 다하는 것이 곧 '일상의 실천'이라는 그의 태도는 작업물에서도 드러난다. 디자이너의 고충을 솔직하게 담아낸 그의 에세이는 1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동료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유영국 회고전 도록과 광복 80주년 기념 저항시인 시집 등에서도 그는 작품의 조형성과 시대적 정서를 섬세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