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미장센과 실제 마굴의 기이한 만남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아비정전’의 결말은 그의 다른 필모그래피와 비교해도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극 중 내내 모습을 감췄던 양조위가 좁고 습한 방 안에서 묵묵히 담배를 태우며 외출을 준비하는 장면은, 후속작이 나오지 않으면서 미완의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대중이 이 엔딩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배경에는 공간이 주는 기이함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공권력조차 접근을 꺼렸던 홍콩의 악명 높은 무법지대, ‘구룡성채’가 그 무대였다.

역사의 틈바구니가 낳은 5만 명의 밀집 도시

구룡성채의 기원은 약 180년 전 청나라가 영국에 맞서 구축했던 군사 요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후 영국과 중국 사이의 관할권이 충돌하는 역사의 공백기 속에서, 이곳은 통제가 불가능한 작은 도시이자 무법지대로 변질되었다. 부산대학교 곽한영 교수가 집필한 신간 ‘구룡성채, 검은 성의 비밀’(흐름출판, 2만 2000원)은 잠실야구장 규모의 좁은 면적에 최대 5만 명이라는 인구가 밀집해 살았던 이 기묘한 장소의 기록을 담고 있다.

범죄와 생존이 공존했던 입체적 공간

낡은 건물들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상공을 비행기가 가로지르는 풍경, 녹슨 철제 발코니와 에어컨 실외기, 그리고 무질서하게 걸린 빨래들이 뒤섞인 모습이 그려진다. 4일간의 홍콩 여정을 담은 여행기 형식의 이 저서는 1994년 철거되어 이제는 실체가 사라진 구룡성채를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묘사로 재현한다. 저자는 이곳이 마약과 도박, 매춘 등 각종 범죄가 판치는 온상이었음을 밝히는 동시에, 갈 곳 없는 정치·경제적 난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었던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법의 부재 속에서 피어난 자치 질서

책에 따르면 구룡성채는 화려한 항구도시 홍콩과 매우 긴밀한 공생 관계를 유지해 왔다. 홍콩의 공식적인 제도나 시장 경제가 충족하지 못하는 수요를 구룡성채가 대신 흡수했기 때문이다. 고가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든 서민들이 찾는 불법 치과가 성채 내에 즐비했으며, 위생 규제나 세금을 피하며 저렴한 어묵과 완탕을 제조해 홍콩 전역에 납품하던 공장들도 존재했다.

법학 연구자인 저자는 국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독자적인 질서를 구축했는지에 주목한다. 시신이 발생하는 등의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스스로 ‘카이퐁’이라 불리는 자치 조직인 주민회를 구성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법과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동체의 규칙까지 붕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구룡성채가 가진 역설적인 매력이자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