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농사일은 서비스 범위 밖”... 여전한 부당 요구
보건복지부가 장기요양서비스 이용자들에게 제공하는 ‘이용수칙’에는 타인의 식사 준비나 빨래, 집안 대청소, 손님 접대, 김치 담그기, 그리고 농사일 등은 돌봄 서비스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서비스 범위를 벗어난 업무를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마련된 지침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이러한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폭언이나 위협에 노출되는 돌봄 노동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공운수노조가 지난 8월 말부터 약 두 달간 실시한 돌봄 노동자 대상 면접조사에 따르면, 이용자나 그 가족에 의한 일터 내 괴롭힘 사례가 다수 확인되었다. 요양보호사를 ‘식모’라고 지칭하며 명절 음식을 만들게 하거나 농사일을 시키는 행태가 보고되었으며, 남성 이용자의 지속적인 성희롱에 항의하자 오히려 이용자 측에서 요양보호사 교체를 요구한 일도 있었다. 한 노인생활지원사는 이용자의 통장 비밀번호를 확인해 달라는 가족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폭언과 위협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돌봄 노동자 10명 중 6명은 폭력·괴롭힘 경험...
노조가 9월 말부터 3주간 13개 직종의 노동자 36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1차 분석 결과, 응답자의 64.6%가 최근 1년 사이 폭력이나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했다. 이러한 고통은 정신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폭력 및 괴롭힘을 경험한 노동자 중 중등도 이상의 우울감을 호소하는 비율은 29.1%로 나타났는데, 이는 괴롭힘을 경험하지 않은 노동자들에 비해 6배 이상 높은 수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22년 재가 요양보호사를 위한 인권보호 매뉴얼을 제작하여, 인권침해 발생 시 상담이나 신고, 업무 중단, 그리고 2인 1조 근무와 같은 대응책을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이 매뉴얼이 작동하기에는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은 피해가 발생했을 때 2인 1조 근무를 시행하거나 대체 인력을 배치하려 해도, 이를 뒷받침할 수가와 예산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결국 노동자가 스스로 피해를 참아내는 상황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민간 위주의 돌봄 시장... 공공성 확보가 관건
2008년 도입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그동안 민간 주도의 양적 확장에 치중해 온 결과,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서비스 질 저하, 지역 간 불균형 및 공공성 약화라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김혜진 집행위원은 소규모 민간 업체들이 난립하며 이용자 유치 경쟁을 벌이는 환경 탓에, 노동자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알리거나 인권침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정부의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현장 노동자들의 대응 노하우를 교육 지침에 반영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돌봄 수요는 급증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공공 인프라는 매우 취약하다. 2024년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전국 2만 8,868곳의 장기요양기관 중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기관은 256곳(0.9%)에 불과했다. 특히 이 중 130곳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어 지역 간 불균형 문제도 심각하다. 김흥수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역대 정부의 돌봄 민영화와 시장화 정책이 돌봄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지적하며, 현재의 돌봄 체계가 공공이 아닌 시장에 의존한 채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