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 대신 질문을 던지다, 의제 형성형 공론화의 시작
미래 사회의 규칙을 누가 정의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던져졌다. 지난 9월 19일부터 1박 2일 동안 진행된 ‘AI 전환에 따른 기본사회 공론화’는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미리 준비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적 질문을 발굴하고 논의의 주제를 직접 만들어가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인공지능(AI)의 급격한 발전과 인구 구조의 변화, 그리고 기후 위기는 일자리와 돌봄을 포함한 우리 삶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위기인지 혹은 새로운 기회인지, 그리고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번 공론화 행사는 9월 19일부터 20일까지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되었다. 행사를 주관한 대통령직속 기본사회위원회는 ‘모두의 기본, 모두의 권리’라는 슬로건 아래, 여러 부처에 분산된 관련 정책을 통합하고 조정하기 위해 올해 1월 국무회의를 거쳐 출범한 기구다. 위원회가 지향하는 ‘기본사회’란 국가와 공동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여 모든 이의 기초적인 삶을 책임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16세부터 80세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여 만든 안전망
기존 사회보장 체계가 안정적인 직장과 가족 모델을 전제로 했다면, 이번 논의는 변화된 환경에 맞춰 소득, 일자리, 주거, 건강, 교육 등을 아우르는 선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뜨거운 감자인 ‘기본소득’ 역시 논의의 핵심 축을 담당한다. 대전환기의 실질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성별, 연령, 지역이 각기 다른 국민 223명이 숙의단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AI 전환의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세금 부담 주체인 16세부터 80세 사이의 국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공론화는 과거 신고리 원전 건설이나 연금개혁 논의와 같은 방식과는 차별화된다. 정해진 정책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제가 미래 사회를 만드는 데 적합한지를 시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의제 형성형’ 모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전형준 (사)한국갈등해결센터 공공본부장은 이번 과정이 시민들이 느끼는 불안을 파악하고 미래의 갈등을 미리 방지하는 ‘예방적 차원’의 성격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국민숙의단의 구성이다. 변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34세 이하 청년층이 전체의 46%를 차지하도록 설계되었다. 한국리서치의 김춘석 공론화센터장은 미래 의제인 만큼 영향권에 있는 세대의 비중을 높였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사전에 AI 대전환과 일자리, 소득 보장 등 6가지 핵심 주제에 대한 온라인 강의를 모두 이수한 뒤, 20개 조로 나뉘어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다.
기술 격차와 재원 마련,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현장
토론 현장에서는 세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주에서 온 김한준(16) 씨는 AI가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했고, 대전의 손선민(21) 씨는 AI로 인한 청년 일자리 감소 문제를 지적했다. 경기도 성남의 정주현(38) 씨는 기본소득 실현이 오히려 근로 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 서울의 화가 이정희(61) 씨는 AI 수익을 통한 기본소득이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뒷받침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기술 격차에 대한 불안감도 감지되었다. 김건후(43) 씨는 AI 비용에 따른 성능 차이와 사용 격차를 걱정했고, 다른 참가자는 기술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재원 마련에 대한 고민도 깊었다. 울산의 김세종(57) 씨는 기본서비스 제공을 위한 재원 확보와 국민적 합의 가능성에 의문을 던졌으며, 손선민 씨 역시 미래 세대의 세금 부담 증가를 우려했다. 이처럼 기술 발전이 가져올 혜택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27개의 비전과 강화된 사회적 책임
이틀간의 숙의 결과, 국민숙의단은 687개의 제안 중 80% 이상의 동의를 얻은 27개의 비전문을 채택했다.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의료 혜택’, ‘공정한 기회가 있는 사회’ 등 ‘기회’와 ‘성장’을 키워드로 한 미래상이 도출되었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힌 것은 ‘일자리와 소득’ 문제였다. 공론화 이후 AI로 인한 고용 위험을 기업과 사회가 공동으로 분담해야 한다는 의견은 63%에서 78%로 15%포인트 상승하며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김유빈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사회보장이 일자리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AI로 인한 고용 불안이 숙의단에게 매우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공론화에 대해 숙의단 98%가 만족감을 나타냈으며, 95%는 타인의 의견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는 이번 의제 형성형 방식이 정책에 대한 동의도와 지속성을 높일 수 있는 유의미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숙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토론에서 도출된 의견들은 10월 중 정책의제기획단을 통해 정교한 정책 의제로 다듬어질 예정이다. 이후 국민숙의단의 검증 과정을 거쳐 오는 11월 정부에 최종 전달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