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에서 소설까지, 경계를 허문 문학적 여정

186부작 대하 사극 <왕과 비>를 비롯해 수많은 명작을 남긴 정하연 작가가 지난 1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44년 4월 20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고인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연극반인 연희극예술연구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 기틀을 닦았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희곡 <산울림>이 당선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이듬해에는 경향신문사와 국립극장이 주관한 장막 희곡 공모전에서 <환상살인>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인은 희곡과 시나리오,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집필 활동을 펼쳤다. 1975년에는 장편소설 <탱고가 흐르는 강>을 발표했으며, 1980년대에는 드라마 극본 작업에 집중했다. 당시 고인은 10여 편의 희곡을 써 내려가는 동시에 제작과 연출까지 겸하며 다각적인 역량을 보여주었다.

사극의 황금기를 이끈 '사극 대가'의 철학

1995년 첫 사극인 <장녹수>를 집필한 고인은 이후 사극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왕과 비>(1998~2000), <명성황후>(2001~2002), <신돈>(2005) 등의 작품을 연이어 흥행시키며 '사극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왕과 비>로 KBS 연기대상 작가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왕과 비>는 수양대군을 고뇌하는 인물로 재해석하며 역사 왜곡이나 미화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인은 2005년 드라마몹과의 인터뷰에서 작가의 역사 해석에 대한 소신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작가가 역사에 대해 정직하다는 의미는 단순한 기록의 준수를 넘어, 당대의 시대정신에 정직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속극의 인기와 동료들의 애도

고인의 작품 세계는 사극에만 머물지 않았다. 1997년 기업 드라마인 <욕망의 바다>를 비롯해, 2010년 <욕망의 불꽃> 등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여러 통속극의 극본을 집필하며 폭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했다. 함께 작업했던 이용석 PD는 SNS를 통해 “지문은 궁궐의 기둥처럼 꼿꼿했고, 대사는 시처럼 간결했다. 지문과 대사 사이에서 향기가 났다. 이 대본을 연출과 배우가 훼손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할 정도였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요동 씨와 딸 요숙 씨(배우), 사위 제임스 티렐이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병원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오는 4일로 예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