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청춘이 아닌, 매 순간 살아있는 자아를 마주하다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쏟아지는 뉴스 사이에서 놓치기 쉬운 여성들의 서사를 '신선함 50%, 행복 30%, 다정함 20%'의 비율로 전달하는 '플랫 레터'가 월 1회 특별한 소식을 전합니다. '플랫한 문화생활' 코너를 통해 책과 영화, 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를 큐레이션하여, 마지막 주 뉴스레터 발송 다음 날인 월요일에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영화 <친숙한 손길>은 요양원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60대 여성 루스의 일상을 조명합니다. 주름진 피부와 하얀 머리칼을 가진 루스는 손님맞이를 준비하며 엉뚱한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하고, 아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호텔처럼 보이는 건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데이트를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곳은 요양원이며 동행한 남자는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작품은 노년 여성을 돌봄의 객체나 과거를 회상하는 존재로만 가두는 기존의 시선을 거부합니다. 루스는 치매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양원 내부의 관계 속에서 두려움, 질투, 성적 끌림 등 생생한 감정을 느끼며 현재를 살아갑니다. 영화는 노인을 성적 욕망이 거세된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며, 치매 노인을 유아적인 존재가 아닌 각 시간대의 자아가 공존하는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그려냅니다. 요양원 돌봄사들 역시 루스의 변화하는 시간을 부정하지 않고 조력자로서 존중을 보입니다. 루스의 손목에 채워진 롤렉스 시계는 그녀가 경제적 여력을 갖춘 노년 여성임을 시사하며, 이는 돌봄의 조건과 존엄한 죽음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비수도권 여성의 고립과 생존을 향한 투쟁

안예슬의 저서 <서울 바깥 여자들>은 비수도권 청년 여성 11명이 겪은 고립 경험을 심도 있게 다룹니다. 저자는 은둔, 니트, 쉬었음 등 모호한 청년의 정의 속에서 비수도권 여성들이 직면한 사회적 맥락을 분석합니다. 특히 수도권 중심주의와 성차별, 가족주의가 이들의 고립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합니다.

비수도권 여성은 가족주의의 영향으로 고립에 더 취약할 수 있습니다. 지역 내 자원 부족과 가족 내 폭력/방임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전문 기관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섬 연애'라는 개념을 통해, 가족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청년 여성이 생존을 위해 결혼이나 남자친구라는 유일한 자원에 의지하게 되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또한, 서울에서의 성공을 기준으로 삼는 능력주의가 지역에 남은 여성들의 구조적 차별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계하며, 성공과 결혼 외에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찾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 올린 삶의 긍정

김새섬과 김진경의 대담을 담은 <난파선의 선장들>은 죽음을 주제로 한 8,000km의 긴 대화 기록입니다. 악성 뇌종양을 앓는 김새섬은 절망 대신 남편과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스위스의 작가 김진경은 그녀의 목소리에 응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책을 매개로 죽음을 삶의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평균 생존 기간이 13개월뿐인 병을 앓으면서도 새섬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녀는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 대신 '왜 나만 예외겠는가'라며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단단함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는 허무주의가 아닌, 세상 속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온전히 살아내려는 의지로 이어집니다. 새섬은 죽음 이후에도 남겨질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유산'을 이야기하며, 삶의 가치와 태도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합니다.

퀴어 영화제를 통해 만나는 다양한 삶의 궤적

계절이 바뀔 때 퀴어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SIPFF)는 소중한 창구가 됩니다. 34개국 116편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다양한 담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지원 감독의 <이상 가족>은 레즈비언 부부의 이혼을 다루며 퀴어 가족의 갈등과 해체를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마르쿠스 슐라인처 감독의 <로즈>는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의 투쟁을 흑백 화면 속 압도적인 연기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애니메이션 <짐 퀸>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 성별 규범을 흔드는 유머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기술의 시대, 파편화된 자아를 긍정하기

최근 한 방송사가 요구한 'AI를 통한 자기소개' 문항은 정체성을 기술에 맡기는 시대의 불안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미국의 아티스트 린 허쉬만 리슨은 전시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을 통해 기술과 결합하며 변주되어 온 자아들을 선보입니다. 1941년생인 그녀는 비디오부터 AI까지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여성의 정체성이 재구성되는 방식을 탐구해왔습니다.

전시에서는 유년기의 혼란을 담은 '카멜레온의 고백'부터, 여성의 신체가 기술적 이미지와 결합하며 대상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살과 기계' 섹션까지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리슨은 "하나의 나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하며, 기술 속에서도 스스로를 해석하고 기록해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AI가 내놓는 단편적인 정의에 맞서, 수많은 페르소나를 가진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기술의 시대에 여성이 존재할 수 있는 진정한 방식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