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려라' 위협하던 애플의 막강한 구매력

과거 메모리 공급사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서라도 다시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애플의 위상이 급변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메모리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과거 을(乙)의 위치에 있던 공급업체들의 입지가 강화된 결과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메모리 기업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글로벌 빅테크 기업 수장들이 앞다투어 한국을 찾는 것과 대조적으로, 애플 경영진은 여전히 한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외신들에 따르면, 애플은 과거 낸드플래시 공급업체들을 상대로 최저가를 보장받는 '최혜 고객' 지위를 요구하며 이들의 회계장부까지 낱낱이 조사하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감사 행위가 워낙 빈번해 글로벌 회계법인인 딜로이트로부터 대량 이용에 따른 할인 혜택을 받을 정도였다. 특히 2015년 샌디스크가 추가 물량 요청을 거절하자, 당시 애플의 구매 책임자였던 토니 블레빈스는 산제이 메로트라 당시 영업 담당자(현 마이크론 CEO)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라도 애플로 복귀시키겠다는 위협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애플은 메모리 가격 하락 시 주문한 물량의 인수를 거부하며 공급업체에 재고 부담을 전가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역전된 시장 주도권과 치솟는 비용 부담

데이터센터 확충에 따른 메모리 수요 폭증은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츠의 분석에 따르면, 2년 전만 해도 애플의 플래시 메모리 구매량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구글 등 4개 기업 합계의 약 2배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들 4개사의 구매 규모가 애플의 2배를 넘어서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애플의 올해 플래시 메모리 구매 비용은 지난해 60억 달러에서 4배 이상 급증한 2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이폰의 저장 용량을 256GB 늘리는 데 드는 추가 원가 역시 작년 15달러에서 올해 66달러로 폭등하며, 메모리 가격 상승이 애플의 수익성 악화로 직결되는 양상이다.

한국행 잇따르는 빅테크 수장들과 애플의 고립

이러한 환경 변화는 한국 메모리 제조사들에게 커다란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뿐만 아니라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전반에 걸쳐 수요가 늘어나면서 협상력이 대폭 강화됐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호황에 힘입어 올해 3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동시에 거두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은 최근 한국을 방문해 최태원 SK그룹 회장 및 삼성 계열사 사장단 50여 명과 만나 협력을 논의했으며, 엔비디아의 젠슨 황 역시 한국과의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반면 팀 쿡 애플 CEO는 2011년 취임 이후 15년째 한국을 찾지 않고 있으며, 올해 9월 부임한 존 터너스 신임 이사회 의장 역시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초기 폴더블폰을 향해 '조잡하고 싸구려 같다'는 혹평을 남기는 등 삼성전자를 겨냥한 듯한 태도를 보이며 한국 기업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