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평화와 생명 존중을 향한 새로운 판각
고려 시대의 정신을 담아 800년 전의 대업을 재현하는 작업이 막을 올렸다. 경남 합천 해인사는 지난 29일 ‘대장경 판각 고불식’을 거행하며, 인류의 평온과 생명 가치를 기원하는 팔만대장경 8만 1352장의 새로운 판각 여정에 돌입했다. 이번 불사는 완공까지 약 50년에서 1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는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다.
몽골 침입의 위기 극복에서 현대적 위기 대응까지
과거 고려인들은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몽골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팔만대장경을 새겨 넣었다. 당시의 판각은 전쟁의 종식과 백성들의 안녕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의 산물이었다. 해인사는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전쟁과 갈등, 기후 위기, 그리고 인공지능(AI)의 급격한 진화와 같은 새로운 위기 상황에 주목하며 이번 판각의 현대적 의의를 정립했다.
수행으로서의 판각과 전통 기술의 계승
해인사 주지 혜일 스님은 이번 불사의 목적이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잇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800년 전 고려인들이 전란의 종식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목판을 깎았다면, 현세의 판각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생명의 가치를 지키며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작업은 기존의 팔만대장경을 복제하거나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새기는 행위 자체를 수행의 과정으로 삼아 고려인들이 보여준 지혜와 정성을 현대에 계승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소중한 전통 판각 기술을 후대에 온전히 전승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