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을 넘어 정체성의 경계를 묻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여성이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과 더불어 독립된 공간인 '자기만의 방'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현대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그 방의 실체는 무엇인가. 부엌과 격리된 물리적 거리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문 뒤의 고독인가. 영국 작가 레이첼 커스크(59)는 신작 소설 ‘퍼레이드’를 통해 여성의 생애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하며, 젠더와 같은 정체성을 지운 채 창작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캐나다 출신인 커스크는 임신, 출산, 결혼, 이혼 등 여성으로서 겪어온 삶의 궤적을 작품에 투영해 왔다. 2001년에는 출산과 육아 과정에서 겪는 자아 상실과 고립을 다룬 ‘일생의 과업’(A Life’s Work)으로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번 소설에서는 오히려 인물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했다. 소설 속 예술가들은 모두 알파벳 ‘G’로만 표기된다. 명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기호는 독자에게 친절한 길잡이가 되지는 않지만, 문장의 높은 밀도와 추상성을 통해 인물과 사건들이 펼쳐지는 ‘행진’의 맥락을 형성한다. 2024년 골드스미스상은 이 작품이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며 형식적 한계를 탐구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예술가 G의 혼란과 깨어진 일상

소설의 두 번째 장인 ‘산파’에는 여성 예술가 G가 등장한다. 그녀는 교외의 넓은 저택에서 남편과 어린 딸, 보모와 함께 생활하며, 정원을 향해 난 창문이 있는 개인 작업실을 갖춘,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을 소유한 듯 보인다. 하지만 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G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깊은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임신을 당혹스러운 사건으로 받아들이며, 아들이 아닌 딸을 출산한 것을 남성성의 계승에 실패한 결과로 간주하는 모순을 보인다. 또한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와 가족의 단란함 속에서 묘한 불편함을 감지한다.

G의 심리적 균열은 섬에서 들은 기이한 전설로부터 시작된다. 죽음을 결심한 이들이 밤중에 문을 열어두면 ‘죽음의 산파’가 찾아와 고통을 끝내준다는 이야기다. G는 어느 순간 작업실 문을 열어두는 행위를 통해 죽음을 예견하듯 행동한다. 이때 문을 통해 들어온 딸은 남성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G는 남성 중심적 질서에 대한 혐오와 복잡한 감정 속에서, 남편의 카메라에 포착되던 수동적인 피사체로서의 딸이 아닌,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딸을 그리기 시작한다. 열린 문틈으로 나타난 딸의 존재가 생명인지, 죽음인지, 혹은 새로운 예술의 시작인지는 모호하게 남는다.

스파이의 정체성, 그리고 '우리'의 시작

소설의 마지막 장 ‘스파이’에서는 남성 영화감독 G의 시선을 통해 정체성 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창작하는 '스파이'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2018년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