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픽의 무단 학습과 한국 저작권자의 위기
미국의 AI 기업 앤트로픽이 자사 인공지능 모델 학습을 위해 전 세계 도서 700만 권을 무단으로 수집했다는 논란이 국제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피해에 대한 보상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정작 저작권을 침해당한 국내 작가들이 실질적인 보상을 받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강, 황석영, 김영하, 김애란, 김숨 등 유명 작가들의 영문판 작품들조차 대부분 번역가 명의로 미국 저작권청(USCO)에 등록되어 있어, 원작자로서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높은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9일 확인한 결과, 국내 문학 작품 중 작가 본인이 직접 권리인으로 등록된 사례는 단 3종(3명)에 그쳤다.
앤트로픽은 나스닥 상장을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기업공개 증권신고서(S-1)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가 위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지식재산권 및 개인정보 침해에 따른 추가 책임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인했다. 만약 향후 저작권 관련 소송에서 불리한 판결을 받게 된다면, 해당 데이터로 학습된 모델의 배포가 금지되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델을 처음부터 다시 학습시켜야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앤트로픽의 이러한 행보는 2021년부터 2022년 사이 디지털 해적판 도서를 대규모로 내려받아 '클로드' 모델 학습에 활용한 사실이 2024년 8월 미국 작가 3인의 소송으로 드러난 이후 본격화되었다. 현재 앤트로픽은 700만 권 중 48만여 권을 대상으로 총 15억 달러 규모의 보상 절차를 밟고 있으나, 이는 지난 7월 법원의 승인을 얻은 결과다.
전수 조사로 드러난 250명 이상의 한국인 피해자
이번 사태는 미국 내에서는 작가와 학자뿐만 아니라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트럼프 등 유명 인사들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점이 쟁점화되며 공론화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미진했다. 한겨레가 합의 관리 웹사이트를 통해 영문 작가명, 도서 제목, 출판사, 미국 저작권청 등록 번호 및 ISBN을 전수 조사한 결과, 피해를 입은 한국인 저자는 학술, 종교, 문학 분야를 포함해 최소 250명 이상(약 290종)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김숨, 김애란, 김언수, 김영하, 김혜순, 배수아, 신경숙, 윤고은, 정유정, 한유주, 황석영, 황선미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으며, 고(故)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및 단편선,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 박재삼의 시선집 등도 확인되었다. 학술 분야에서는 장하준 교수, 고(故) 정병호 명예교수, 조동철 전 원장, 오명 전 장관 등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계를 포함하면 전체 피해 규모는 약 340명에 달한다.
한국인 저자들이 보상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영문판이 아니면 제외되며, 영문판이라도 일정 기간 내에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되지 않으면 대상에서 빠진다. 설령 대상에 포함되더라도 해외 출판사나 번역가만 권리인으로 등록된 경우가 많아 작가가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교육용 서적'으로 분류되면 문학 작품에 적용되는 5:5 배분 규칙도 적용받지 못한다. 결국 저자는 번역가나 출판사의 선의에 의존하거나, 지난 3월 마감된 보상 중재를 놓친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별 소송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다. 실제 분석 결과, 저자가 직접 권리인으로 등록된 경우는 40종(37명) 정도였으며, 이 중 국내 문학은 신경숙의 '외딴방',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 고상미의 '신발 신은 강아지'뿐이었다. 한강, 김영하, 김애란 등의 작품은 대부분 번역가나 출판사가 권리인으로 되어 있었다.
'도서 탈곡' 논란과 국제적 법적 분쟁의 서막
앤트로픽은 데이터 수집 방식이 스캐닝과 웹 스크래핑 등으로 변화했다고 밝히며, 이 과정에서 지식재산권 보호 여부를 완벽히 검증하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이는 최근 유럽과 아시아에서 서적들을 대량 구매한 뒤 스캐닝 후 폐기하는 이른바 '도서 탈곡' 방식과 맞물려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앤트로픽의 합의가 종결된 것은 아니며, 합의를 거부한 작가와 출판사들이 추가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특히 미국 법원의 '공정 이용'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과 함께, 미국식 공정 이용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유럽연합 및 캐나다의 움직임도 변수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작가들과 언론사들이 앤트로픽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한국 정부의 대응도 시작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미국 법원 판결에 대응해 작가들의 권리 회복을 지원하고, 제외된 저자들을 파악해 집단 소송 등의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저작권 에이전시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예상치 못한 일이라며 업계와 학계, 공공의 협력을 통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부커상 수상자인 아룬다티 로이는 이번 사태를 '인간성에 대한 범죄'이자 '생명 채굴(life-mining)'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으로 학습된 AI가 창작자의 고유성을 위협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표했다. 인류의 혁신을 강조하는 앤트로픽의 비전과 창작자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가운데, AI 모델 '클로드'와 인간 창작자 사이의 거대한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