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여성 항일 영웅들과의 결별
영화 <암살>(2015)의 안옥윤(전지현 분)은 독립군을 이끄는 저격수였으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의 고애신(김태리 분)은 양반가 애기씨로서 밤마다 복면을 쓰고 의병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tvN 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의 주인공 이가경(김유정 분)은 기존 영상매체가 그려온 여성 항일운동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1932년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가경의 주된 특기는 소매치기이며, 습관처럼 거짓말을 일삼는다. 선교사 집의 하녀로 지내며 서러운 유년기를 보냈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영어 실력뿐이다. 그녀의 유일한 꿈은 돈을 모아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100일의 거짓말>은 조선을 탈출하려는 가경이 우연히 무장투쟁 조직인 구국단과 얽히며 겪는 사건들을 다룬다. 현재 6회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웰메이드 작품이라는 찬사 속에 전국 평균 시청률 9.5%를 기록하며 두 자릿수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리지널 각본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
이 작품은 웹툰이나 웹소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오리지널 각본이다. <낭만닥터 김사부>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연출한 유인식·김윤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류보리 작가가 집필했다. 류 작가는 2023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하기에 앞서 5년 동안 작품을 구상해 왔다. 그녀는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삶을 던질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과 '불확실한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이 무엇을 믿고 나아갔는가'라는 질문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가경에게 독립운동 참여는 당연한 숙명이 아니다. 영어에 능통한 그녀는 구국단으로부터 조선총독부 통역생으로 잠입해 밀정 역할을 수행해달라는 제안을 받지만, 죽고 싶지 않다는 진심과 위악을 섞어 이를 거절한다.
생존이 우선인 개인과 사명을 짊어진 중년
가경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살았다. 종로경찰서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을 들어온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신의 생존과 주변인의 안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