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의료전달체계와 동네 의원의 실상

고병수 저자가 집필한 ‘바틀비’의 신간(328쪽, 2만 2000원)에 따르면, 한국의 의료 현장은 일차의료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흔히 ‘일차의료기관’이라 하면 동네 상가에 위치한 소규모 병원을 떠올리지만, 한국의 실상은 다르다는 분석이다. 해외의 경우 가정의학을 중심으로 지역 의료를 책임지는 동네 병원이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한국의 동네 병원들은 피부과, 안과, 정형외과, 산부인과처럼 특정 진료 과목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많아 진정한 의미의 일차의료기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일차의료기관이 갖춰야 할 핵심 가치로 주민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밀하며 지속적인 돌봄을 강조한다. 저자가 현재 근무 중인 제주시 구도심의 의료기관은 여러 의사가 공동으로 개원한 형태를 띠고 있어, 매일 밤 11시까지 진료를 이어가며 지역 사회에 밀착하고 있다. 특히 거동이 힘든 환자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약을 처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절한 운동법까지 지도하는 등 밀도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제주에서 시작된 ‘한국형 주치의’의 가능성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지역 내 흔한 질환은 일차의료기관이 전담하고, 중증 질환은 종합병원이나 전문 병원이 맡는 식으로 의료전달체계가 체계화되어 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의 의료 체계가 오히려 퇴보했다고 진단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은 전문 병원들이 과도한 경쟁을 벌이며 곳곳에 들어서 있는 반면, 인구 밀도가 낮은 지방은 병원 자체를 찾기 어려운 의료 공백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법으로 저자는 지역 주민을 촘촘하게 관리하는 ‘한국형 주치의’ 모델을 제시한다. 저자는 지난해 10월부터 제주도에서 추진된 ‘제주형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의 기획자로서 그 실효성을 검증해 왔다. 사업 초기에는 주민이 주치의를 등록하거나, 의사가 만성질환자에게 건강관리 교육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차 적응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방문 진료를 시행하는 의원도 늘어났으며, 주치의들이 환자 한 명에게 할애하는 시간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모델은 지난달 말 전국 120개 의원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확산이 시작되었다.

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사회적 합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저자는 의사 인력의 양적 확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면서도, 현재 전체 임상의사 중 일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저자는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어떤 성격의 의사를 더 확보해야 할지에 대해 심도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