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낸 발과 피로 가린 사랑의 흔적
송찬호 시인의 ‘분홍 나막신’ 속에서 님은 화자가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발에 딱 맞지 않는 조금 작은 나막신을 건네고 떠나간다. 화자는 마치 아이와 같은 순수한 열망으로 그 신을 신기 위해 발톱을 깎고, 뒤이어 발뒤꿈치와 복숭아뼈까지 깎아내며 자신의 발을 신의 크기에 맞춘다. 나막신 코 부분에는 흘러나오는 피를 감추기 위해 맨드라미즙을 바르기도 한다. 만약 화자가 신의 내부를 자신의 발 치수에 맞춰 파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면 사랑과 이야기는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마음이 일렁일 때 비로소 멈출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님과 그로 인해 열리는 사랑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화자의 태도와 내면을 묘사하며 마무리된다. 그 이후의 전개는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삶의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16.6년의 여정, 100켤레의 나막신이 완성한 춤
이안 시인은 자신에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이처럼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깎아 신에 맞추며, 하나의 나막신에서 다음 단계로 끊임없이 입문해 왔다는 것이다. 두 달마다 한 켤레씩 나막신을 제작하고 교체하며 걸어온 16.6년의 세월은, 총 100켤레의 신발을 신발장에 채워야만 비로소 끝이 나는 하나의 춤과 같았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이 시인의 나막신은 두 달이라는 유통기한이 있어 제때 갱신하지 않으면 춤이 즉각 중단된다는 점과, 100켤레를 모두 채운 뒤에는 다른 이에게 이를 넘겨주고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이제 막 100켤레의 나막신을 신발장에 모두 채우게 된 시인은, 이제 누가 이 신발을 사서 당신에게 전달해 줄 것인지 자문한다. 그는 당신이 이 소식을 오래 기다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이미 보았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흐르는 고통 속에서도 이 춤을 결코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동시의 세계를 일구는 편집자 이안
이안 시인은 1999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그간 ‘네모 코끼리 전시회’, ‘시를 위한 패턴 연습’, ‘오리 돌멩이 오리’, ‘글자동물원’ 등의 동시집을 출간했으며, 동시론집인 ‘따라 읽다가 저절로 동시 쓰는 법’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또한 ‘동시마중’과 ‘블랙’을 만들어가는 편집자로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