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일, 정부는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공식 발표했다. 이번 계획은 탄소중립을 단순한 환경 보호 차원을 넘어 국가의 핵심 산업 및 경제 정책의 중심축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산업군의 전환을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지원하고, 저탄소 제품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정부가 투자 위험을 분담하고 전환금융을 제도화하며, 지역 경제 상황과 사회적 수용성까지 통합적으로 고려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반복되는 정책의 용두사미 우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정부가 내놓았던 거창한 산업·에너지 정책들이 실질적인 성과 없이 마무리된 사례는 매우 많다. 2004년 신재생에너지 원년을 선포한 이후, 2010년에는 5년 내 세계 5대 신재생에너지 강국 도약과 2030년까지의 국가 단위 스마트그리드 구축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2026년이 다가오는 현재,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으며 스마트그리드 역시 시범사업 이후 진척이 미미하다. 수소 정책 또한 노무현 정부의 마스터플랜부터 문재인 정부의 로드맵, 윤석열 정부의 청정수소 육성정책까지 정권 교체를 거치며 이어졌으나, 수소차와 충전소 보급 등 주요 지표는 당초 목표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는 재정 투입과 기술 개발, 생산 목표 설정만으로는 자생적인 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시장을 움직이는 '수요 견인' 전략
이번 K-GX가 제시한 목표치 역시 매우 도전적이다. 2035년까지 전기차 세계 3위권 진입, 소형모듈원전(SMR) 세계 시장 점유율 40% 달성, 그리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용량 100GW 조기 달성 및 2035년 발전 비중 30% 이상 확대 등을 목표로 삼고 있다. 높은 목표 설정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송전망 확충과 계통 혼잡 해소, 전력 수급의 유연성 확보라는 전제 조건 없이 설비량만 늘리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목표 수치보다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제도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전략에는 '탈탄소 제품의 신시장 창출'이라는 차별화된 접근법이 포함되어 있다. 저탄소 및 녹색 제품의 표준화와 인증을 확대하고, 공공구매를 통해 초기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기업의 투자와 생산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특히 저탄소 철강을 활용한 자동차 구매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은 발상의 전환으로 평가된다. 철강 기업에 단순히 저탄소 설비 도입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설비로 만든 제품이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철강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탄소를 저감하더라도 제품의 품질이 기존 제품과 동일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높은 가격을 수용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동차 구매를 지원하면 자동차 제조사의 수요가 늘어나고, 철강사는 안정적인 수요를 바탕으로 설비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즉, 수요가 기술과 투자를 이끌어내는 '시장 견인(Market Pull)' 구조가 '기술 추진(Technology Push)'을 유도하는 형태다. 이것이 탄소중립 산업 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전력 및 배출권 시장과의 유기적 결합
공공조달을 통한 저탄소 제품 구매 역시 규모를 키워야 한다. 단순히 조달청의 직접 구매 품목을 늘리는 수준을 넘어, 철강과 같은 장치산업이 최소 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 발주나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건설 공사까지 저탄소 제품 사용 기준을 확대해야 기업이 장기 계약을 믿고 투자할 수 있다. 이는 정부가 생산비를 무한정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수요를 보장해 시장 자립을 돕는 정책이다.
결국 핵심은 구축된 신시장이 전력 시장 및 배출권거래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저탄소 철강 생산에는 무탄소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며, 수소환원제철 역시 막대한 청정 전력과 수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현재 전략은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에 치중해 있을 뿐, 전력 가격과 거래 방식의 혁신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분산에너지 특구의 직거래 제약이나 지역별 전기요금의 불확실성은 기업의 장기 투자 계산을 어렵게 만든다. 발전 비용, 시간대별 수급, 송배전망 혼잡 비용이 가격에 반영되어야 재생에너지와 저장장치, 수요반응 투자의 경제성이 확보된다. 정부는 가격 결정자가 아닌, 공정한 거래 규칙을 수립하고 감독하는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
배출권거래제 역시 과제다. 정부가 시장안정화 예비분을 통해 공급량을 조절하며 가격 변동을 막을 수는 있지만, 배출권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린다고 해서 저탄소 제품의 수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배출권 가격과 저탄소 제품 시장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저탄소 제품 구매 인센티브로 수요가 늘고 생산량이 증가해 기업의 감축 설비 투자가 촉진되면, 실제 배출량이 줄어들면서 기업의 배출권 수요도 변화한다. 이처럼 감축 비용, 수요, 배출권 가격이 상호작용하며 시장이 작동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가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감축 행위가 기업의 수익으로 직결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
K-GX 전략이 과거와 다른 점은 제품을 구매할 시장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데 있다. 이제는 실행 계획을 통해 전력 가격, 배출권 가격, 저탄소 제품 가격이 맞물리는 시장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급된 1000조 원 규모의 투자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모든 것을 직접 책임지려는 관성에서 벗어나, 핵심 참여자들의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판을 짜야 한다. K-GX의 성패는 전력, 배출권, 저탄소 제품 시장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통합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