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무궁화호의 설렘을 안고 다시 찾은 묵호
가을이 깊어지며 차분하고 깊어진 빛을 머금은 바다가 그리워질 때면, 하석미 씨는 21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던 목적지는 바로 묵호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휠체어 여행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르는 설렘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행복했다. 묵호에 도착했을 때 모든 길을 순조롭게 지나갈 수는 없었지만, 조이스틱 하나에 의지해 낯선 골목을 누비며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여행의 큰 기쁨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묵호역은 흑백사진 속 풍경과 현재의 모습이 교차하는 묘한 공간이었다. 골목 곳곳에 자리한 벽화와 조형물들, 특히 바닥에 펼쳐진 거대한 흑백사진은 과거 이곳을 오갔을 사람들의 흔적을 상상하게 했다. 동화 속 어린 왕자와 여우가 그려진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물론 언덕을 따라 형성된 동네 특성상 경사와 턱이 있는 구간이 있어 전동휠체어로 이동 가능한 길을 골라 천천히 살펴야 했지만, 그 길 위에서 발견하는 풍경은 여전히 즐거웠다.
묵호항의 활기와 도째비골에서 만난 푸른 바다
묵호항은 관광객을 위한 인위적인 풍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이어지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수조 속에서 헤엄치는 광어와 우럭, 그리고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항구 특유의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항구 근처 식당에서 맛본 노릇노릇한 생선구이는 여행지의 설렘과 어우러져 더욱 고소한 맛을 선사했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향한 도째비골 해랑전망대는 바다 위로 길게 뻗어 있어, 마치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듯한 개방감을 주었다. 전망대 바닥이 철망 구조로 되어 있어 휠체어 이용 시에는 바퀴의 진동이나 주행감을 세심히 살펴야 했지만, 수평선을 바라보는 시야는 그만큼 넓고 시원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넘지 못한 이동의 장벽
하지만 높은 곳에서 묵호를 내려다보기 위해 도전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묵호등대 길은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묵호등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경사가 매우 가팔라, 전동휠체어 모터에 과부하가 걸려 세 번이나 쉬어가야 했다. 휠체어 기종과 사용자의 상태에 따라 이러한 급경사는 위험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힘겹게 도착해 마주한 동해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나,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반드시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았다. 누군가에게는 운동일지 몰라도, 교통약자에게는 이러한 경사가 여행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대한 장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아쉬운 점은 관광 시설의 연결성 문제였다. 스카이밸리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왔지만, 엘리베이터 문을 나선 뒤 마주한 길은 다시 급경사 내리막이었다. 전동휠체어로 속도와 방향을 제어하기 어려운 길 앞에서 결국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처음의 차도를 이용해 내려와야 했다. 단순히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것을 넘어,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이동 동선 전체가 누구나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무장애 관광은 시설의 유무가 아니라, 실제 이용자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그 시설을 누릴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