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변수가 빚어낸 민주주의의 꽃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는 단순히 인간의 의지와 치밀한 계획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변수와 우연의 요소가 결합하며 꽃을 피운다. 뉴질랜드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20년 총선 당시 여성 의원 비율은 48.3%에 달할 만큼 여성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1869년 메리 앤 뮐러의 익명 주장으로 시작된 논의는 1885년 케이트 셰퍼드가 이끄는 여성기독교절제회(WCTU)의 대규모 청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1893년 의회에 제출된 선거법 개정 청원서는 당시 성인 백인 여성 인구의 4분의 1인 3만 2000명의 서명을 담은 274m 길이, 7kg 무게의 거대한 유산이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이라는 역사적 결실을 낳았다.
이 과정에는 당시 남성 중심 정당들의 복잡한 역학 관계도 얽혀 있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자유당은 여성의 정치 진출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의원이 여성의 표를 통해 열세를 극복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자 태도가 변했다. 특히 보수적인 농촌 여성들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리면서 자유당의 입장도 바뀌었다. 결국 세계 최초의 여성 투표권은 여성들의 끈질긴 투쟁과 정치적 우연이 맞물려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념보다 강력했던 유권자의 실리
조귀동 저자의 '결정적 선거들'은 지난 100여 년간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18번의 선거를 조명한다. 저자는 국회의원 보좌관과 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선거가 민주주의를 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괴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적한다. 선거는 단순한 정치인의 드라마가 아니라 사회적 균열이 특정 시공간에 표출되는 사건이다. 유권자들은 종종 거창한 이념보다 당장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다.
1945년 7월 21일 전승기념식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던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은 불과 5일 뒤 치러진 총선에서 의석이 반토막 나는 참패를 겪었다. 영국 국민들은 '투명인간'이라 불리던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에게 승리를 안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계급 장벽이 낮아진 영국 사회는 복지 국가를 갈망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노동당의 공약집이 150만 부나 팔려나갈 때, 처칠은 여전히 '대영제국의 영광'만을 외치며 민생 문제에 무감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역설이 나타났다. 1988년 2월 25일, 군사 반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는 민주주의를 가치로 내세우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의 후계자가 당선된 배경에는 야권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있었다. 또한 저자는 노태우가 내건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가 중산층의 심리를 파고들었다고 분석한다. 당시 중산층은 민주화를 원하면서도 경제적 안정이 흔들리는 것은 경계했다.
무너지는 규칙과 21세기 정치의 변곡점
미국의 사례는 민주주의의 규칙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2000년 대선 당시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의 접전은 플로리다주 재검표 분쟁을 야기했다. 중앙정부와 법원이 충돌하는 36일간의 혼란 속에서도 고어 부통령은 결과에 승복하며 규칙을 지켰다. 그러나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난입하며 이러한 전통은 위협받았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2024년 다시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특히 2024년 대선은 단 10명의 부자가 정치자금의 44%를 지원하는 등 외부 조직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21세기 정치의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선거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현실 정치가 펼쳐지는 치열한 현장이다. 유권자는 가치보다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하며, 기성 정당이 이에 답하지 못할 때 포퓰리즘이나 극우 세력이 득세한다. 1933년 독일 나치스나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처럼, 현대에는 트럼프와 프랑스의 국민연합, 독일의 AfD가 그 길을 걷고 있다. 민주주의가 갈지자로 전진한다는 저자의 통찰은 복잡한 정치 국면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각기 다른 판단의 근거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