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회장 승진 대신 사장급 역할 확대 선택한 SK
SK그룹이 부회장 승진을 억제하는 대신 사장급 경영진의 책임과 역할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과거에는 주요 사업군을 지휘할 부회장급 사령탑을 보강하는 데 주력했으나, 이제는 사업 재편과 수익성 확보, 글로벌 고객사 대응 등 구체적인 경영 과제를 수행할 사장급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30일 열린 임시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따르면, 각 계열사 이사회가 결정한 2027년 사장단 인사가 공유됐다. 이번 명단에는 부회장 승진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장용호 SK 대표와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등 핵심 경영진은 기존 직급을 유지하며 유임됐다.
그룹은 '안정 속의 쇄신'을 기조로 내세웠으나, 실질적인 인사 내용은 직급의 상승보다 역할의 변화에 집중되어 있다. 지주사인 SK는 전략 수립과 운영 개선의 기능을 분리했으며, 에너지 계열사는 전력 사업 전환과 현금 흐름 창출에 특화된 인물을 배치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개발총괄 출신 사장을 미국 현지로 보내 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곽노정·장용호 유임…부회장 중심에서 사장 중심 체제로
이번 인사를 앞두고 곽노정 대표와 장용호 대표의 부회장 승진 여부가 큰 주목을 받았다. 곽 대표는 AI 메모리 시장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역대급 실적을 이끌었고, 장 대표는 그룹 포트폴리오 재편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아 승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사장 직급을 유지했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의 인사 패턴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SK그룹은 2020년 박정호·유정준, 2021년 장동현·김준 등 2년 동안 4명의 부회장을 배출하며 핵심 사업을 부회장급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부회장 승진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지난해 이형희 당시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이 4년 만에 승진한 이후 올해는 다시 승진자가 끊긴 상태다.
경영 방식의 변곡점은 2023년 말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선임되면서 나타났다. 당시 지주사 SK와 SK이노베이션에 각각 장용호·박상규 사장이 배치되고, SK하이닉스가 곽노정 단독 대표 체제로 전환되면서 그룹 조정 기능이 재편됐다. 이는 주요 계열사의 경영 책임을 사장급 CEO에게 직접 위임하는 구조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 부회장들의 행보도 직급 유지 속 사업 전환에 초점이 맞춰졌다. 장동현 부회장이 SK에서 SK에코플랜트로 자리를 옮긴 사례처럼, 직급을 높이기보다 사업별 책임과 역할을 재조정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지난해 11명의 사장 승진자를 배출하며 경영진을 보강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승진 규모를 줄이고 기존 인력을 핵심 보직에 재배치하며 실행력 제고에 집중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주요 그룹들이 부회장 직급을 줄이는 추세라고 분석하며, SK수펙스추구위원회의 변화가 없는 것은 리밸런싱 과정이 아직 진행 중임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SK하이닉스의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다른 계열사들의 실적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한 점이 적은 승진 폭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주사 사업 재편과 에너지 계열사 수익성 강화
지주사 SK는 장용호 대표를 유임시키고, SKC 전략부문장이었던 김선혁 씨를 담당 사장으로 승진시켜 배치했다. 장 대표가 재무 전략과 포트폴리오 관리를 총괄하면, 김 사장은 계열사의 운영 개선을 지원한다. SKC에서 쌓은 사업 모델 혁신 경험을 그룹의 수익성 개선에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은 정승일 미래성장 담당 사장과 강동수 담당 사장을 각각 각자대표로 내정해 역할을 분담했다. 산업부 차관 및 공기업 사장을 역임한 정 사장은 전력 시장과 에너지 정책 전문성을 바탕으로 신규 전력 사업을 확장하며, 전략·재무 경험이 풍부한 강 사장은 기존 사업의 현금 창출력과 운영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이는 전력 사업 확대와 기존 에너지 수익을 신사업 투자로 연결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화학 부문에서는 김원기 SK엔무브 사내독립기업(CIC) 사장이 SK지오센트릭 사장을 겸임하며 고부가 화학 사업의 수익성을 개선한다. SK어스온과 SK온 트레이딩인터내셔널에는 김경준·김태진 사장이 배치되어 자원 개발과 트레이딩 수익 강화를 맡는다. SK디스커버리에는 윤병석 사장이 이동하며, 후임 SK가스 대표에는 송경열 전략본부장이 내정되어 LNG 가치사슬 확대와 재무 구조 개선을 이끈다.
그룹 전략 및 해외 사업 인력도 재배치됐다. 권영수 SK이노베이션 전략본부장은 수펙스추구협의회 담당 사장으로 승진해 계열사 간 협력을 맡으며, 추형욱 사장은 신설된 동남아 총괄에 배치되어 AI와 친환경 소재의 현지 사업화를 추진한다.
SK하이닉스, 기술력 기반의 글로벌 고객 대응 체제
SK하이닉스는 곽노정 대표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장급 경영진의 역할을 세분화했다. 특히 미국 현지에 '미주총괄'이라는 사장급 조직을 신설해 AI 메모리 시장의 빅테크 고객사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안현 개발총괄 사장이 미주총괄로 이동해 HBM과 소캠(SOCAMM) 등 차세대 메모리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 현지 R&D 협력을 확대할 예정이다.
안 사장의 빈자리는 차선용 미래기술연구원장 사장이 맡아 선행 기술과 제품 개발의 연계성을 높인다. 윤풍영 수펙스추구협의회 담당 사장은 SK하이닉스 코퍼레이트센터 총괄 사장으로 이동해 글로벌 사업 확장과 신성장동력 발굴에 집중한다. 이번 인사는 부회장급 보강보다 사장급 인력에게 구체적인 과제를 부여하는 SK의 변화된 흐름을 보여준다.
SK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가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본원적 경쟁력을 다지고, 선제적인 사업 재편과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