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여파로 급등한 국제 에너지 가격
중동 지역의 전쟁 발발로 인해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약 4년 만에 MWh당 100유로 선을 돌파하면서, 한국전력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현재 한전의 부채 규모는 올해 상반기 기준 210조 7000억 원에 달하며, 매일 약 115억 원의 이자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재무적 압박은 향후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등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국가 핵심 인프라 구축 사업의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인베스팅닷컴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마감된 유럽 천연가스 지표인 ‘더치 TTF 선물’은 MWh당 103.94유로를 기록했다. 이는 2022년 12월 이후 처음으로 100유로를 넘어선 수치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LNG 운송로의 불안정성과 겨울철 대비 가스 확보 경쟁이 맞물린 결과다. 아시아권의 기준인 ‘동북아 LNG 선물(JKM)’ 역시 MMBtu당 32.84달러로 1년 전보다 높은 수준을 보이며, 유럽과 아시아 간의 물량 확보 전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스 가격 상승에 따른 대체재인 석탄 수요 증가로 인해 호주산 발전용 석탄 가격도 전쟁 전보다 약 30% 상승한 톤당 150.45달러를 기록했다.
연료비 폭등과 한전의 수익성 악화 구조
국제 에너지 가격의 상승세는 국내 시장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 결과, 지난 9월 발전용 LNG와 석탄의 연료비는 전년 대비 각각 34.6%와 40% 급등했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의 위기와 유사하게 보고 있다. 발전소로부터 전력을 구매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구조를 가진 한전은, 전기 요금이 사실상 묶여 있는 상태에서 연료비가 오르면 고스란히 적자를 떠안게 된다. 실제로 2022년 한전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약 33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실제로 지표상 위기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월 한전의 전력 구입 단가는 전년 동기보다 17.6%나 올랐으나, 오히려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평균 단가는 1.2% 하락했다. 이는 높은 산업용 전기료를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자체 발전을 늘리는 등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4월 정부가 대형 사업장의 주간 요금을 kWh당 최대 16.9원 인하하고 심야 요금을 5.1원 인상한 조치도 한전의 매출 감소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55조 원 규모 전력망 투자 계획의 불확실성
가장 큰 문제는 한전의 재무 상태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전력망 확충을 위한 투자 규모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전은 반도체 공장 및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총 55조 300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생산 비용은 급증하는 반면 판매 가격은 동결되어 수요마저 줄어드는 악순환이 지속되면, 적기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정부와 전기료 인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연제 서울과기대 교수는 원칙적으로는 소비자 부담을 통한 요금 현실화가 맞지만 물가 안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반도체 호황으로 확보된 세수를 활용해 미래대응기금을 전력망 확충에 사용하는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