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탑동에서 실현되는 365일 연속성 있는 의료
제주시 탑동은 과거 해변에서 주민들이 보말고둥이나 게를 채집하던 정겨운 원도심의 풍경을 간직한 곳이다. 1980년대 매립 사업을 거치며 호텔과 상업 시설이 들어선 현재는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가 되었다. 이 지역에는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1년 내내 쉬지 않고 운영되는 유명한 병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해산물 섭취 후 복통을 겪는 관광객이나 갯바위에서 성게 가시에 찔린 이들, 그리고 휴일이나 늦은 밤 갑작스러운 고열과 장염으로 고통받는 지역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2001년 8월 문을 열 당시, 종합병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원이 저녁 6시면 영업을 종료하던 상황에서 이들의 행보는 주변 의원들의 시선과 달리 틈새시장을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고병수 가정의학과 전문의의 여정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그는 의대생 시절 사당의원의 김록호 원장처럼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의사의 삶을 동경하며 가정의학과 의사를 꿈꿨다. 개원 후에는 주 1회 저녁 무료 진료를 시행하고 의료 개혁을 위한 시민단체 및 학술 활동에 매진하며 지역 사회의 이웃으로 살아왔다. 이후 고향인 제주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귀향을 결심했고, 2008년 동료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현재의 병원을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그의 기록을 담은 ‘동네의사로 살아보니’는 탑동365일의원을 이끄는 고 원장의 현장 보고서다.
환자의 생애를 함께하는 주치의의 역할
규모가 큰 의원이지만 진료실의 공기는 매우 친근하다. 고 원장은 환자와 마주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골 환자의 검사 결과를 세밀히 살펴 불필요한 약 처방을 줄이거나 추가 검사를 권유하는 등 세심한 관리를 이어간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 환자에게 직접 혈압약을 전달하며 무릎 운동법을 지도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주치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환자 가족의 병력을 파악해 생활 습관 교정과 체중 관리를 돕는 등 건강을 복합적으로 조망한다.
저자는 단순히 환자를 많이 진료하여 수익을 올리는 구조가 의사와 환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고령이라서, 혹은 노환이라는 이유로 적절한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아토피 같은 만성질환도 의사의 구체적인 설명과 환자의 실천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주민과 밀착된 '동네병원'이 중심이 되어 적절한 안내를 수행할 때 의료 재정을 보호하고 의료진에게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간 진료와 주치의 제도가 결합한다면 의료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며 지역 주민의 건강을 섬세하게 돌볼 수 있다.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제언
고 원장은 정책적 개선 방향에 대해서도 명확한 견해를 제시한다. 일차의료 전문의를 확대하고 단골 의사에게 제도적 보상을 제공한다면, 환자들의 불필요한 의료 쇼핑을 줄이고 국가 건강 재정 지출도 효율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건강보험 재정 내 정부 부담 비중을 높여 보장성을 강화함으로써, 소위 '3분 진료'나 '박리다매식 진료'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일차의료의 꽃'이라 불리는 주치의제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환자가 특정 의사나 기관에 등록해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맺고 건강 돌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 '제주형건강주치의' 시범사업을 통해 등록, 건강 평가, 맞춤형 관리, 비대면 진료, 방문 의료, 돌봄 연계 등 10가지 핵심 서비스를 선보였으며, 시행 1년 만에 환자와 의사 모두가 만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모델은 필수의료 기피, 저수가 문제, 수도권 대형 병원 쏠림 현상 등 한국 의료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꼽힌다.
고 원장은 어린 시절 배꼽 소독을 위해 찾았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군 입대 인사를 하러 오는 과정을 통해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지속적인 신뢰가 국민 건강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는다. 그는 환자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환자가 곧 의사의 거울과 같은 존재임을 느낀다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