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을 바꿀 ‘기계의 시대’의 서막

미국을 대표하는 벤처캐피털(VC)인 앤드리슨호로위츠(a16z)가 지난 8월, 인공지능(AI) 하드웨어 분야에 집중 투자하기 위해 11억 달러(한화 약 1조 5000억 원) 규모의 ‘머신 에이지(기계의 시대) 펀드’를 조성했다. 펀드 결성 발표가 있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공동 총괄을 맡고 있는 라구 라구람 매니징 파트너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하고 나섰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의 인식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지나치게 낮게 보는 반면, 실제 사회에 도입되는 속도는 지나치게 높게 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VM웨어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던 라구람은 현재의 AI 열풍을 과거 전기가 발명되었던 순간에 비견했다. 그는 챗GPT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만 해도 클라우드 기술 이후의 변화라고 예상했으나, 현재는 전기가 가져온 혁명과 맞먹는 수준의 변화라고 판단하고 있다. 클라우드가 기업의 IT 환경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면, AI는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산업 전반에 걸쳐 거대한 변혁을 일으킬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전기 모터가 초기에는 산업 현장에서만 쓰이다가 결국 가정 내의 청소, 조리, 냉방 기기 등 일상 곳곳에 스며들었듯, AI 역시 현재는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수요와 쓰임새를 창출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아직 AI의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인구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발생할 수요의 대부분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AI 인프라 전반을 아우르는 전략적 투자

이번 펀드 명칭인 ‘기계의 시대(machine age)’에는 증기 기관이나 인터넷, 반도체의 등장이 인류의 문명을 뒤바꿨던 것처럼 AI가 인간과 기계의 협업 방식 및 업무 형태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a16z는 이번 펀드를 통해 AI 시대를 지탱할 핵심 기반인 칩과 메모리,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 영역부터 로봇 산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투자 대상을 설정했다. 특정 분야에 투자 비중을 고정해두지는 않았다. 라구람은 연산 능력이 향상되면 데이터를 전달하는 네트워크가, 처리해야 할 데이터 양이 늘어나면 메모리가 병목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병목 지점이 이동함에 따라 AI 인프라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며 투자할 계획임을 밝혔다. 투자자를 선정할 때 가장 핵심적인 잣대는 창업자의 역량이다. 그는 하드웨어 분야의 창업자라면 기술적 전문성은 물론, 글로벌 공급망 내 대기업들과 협상할 수 있는 능력과 첫 고객을 확보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메모리·제조 경쟁력에 주목

한국을 찾은 라구람이 특히 눈여겨본 지점은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 분야의 강력한 경쟁력이었다. 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언급하며, AI 시대에 메모리의 중요성이 급격히 커짐에 따라 이들 기업이 엔비디아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추격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한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근거로 대규모 생산 능력과 혁신 역량, 그리고 서구권 공급망과의 긴밀한 관계를 꼽았다. 엔비디아의 칩을 활용하는 서구권 기업들은 이 공급망과 연결된 메모리 업체들의 기술력을 선호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또한 세계적인 수준의 메모리 기업과 전문 인력이 한국에 집결해 있다는 점을 들어, 차세대 메모리 기술의 혁신 역시 한국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라구람은 인터뷰 전날에도 한국의 기업 4~5곳을 방문했으며, 일부 기업의 투자 조직을 통해 스타트업들과도 접촉을 이어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