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걷어낸 중세의 재발견
흔히 중세 시대를 문명과 정신이 퇴보한 '암흑기'로 규정하곤 하지만, 이는 14~15세기 르네상스를 이끈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돋보이게 하려 만든 편견에 가깝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취가 서로마 제국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는 시각은 단편적이다. 실제 중세는 고대의 유산을 보존하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꽃피운 역동적인 시기였다. 프랑스 사학자 장 베르동이 언급했듯, 중세 1000년은 고대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근대가 돌연 탄생한 단일한 시기가 아니다.
이러한 중세의 다층적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한국서양중세사학회가 기획한 '유럽의 도시에서 중세사 읽기'가 출간됐다. 16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이 책은 근대 국가 성립 이전부터 발달한 유럽 도시들의 흔적을 통해 중세를 탐구한다. 성백용 한남대 교수는 이 시기를 기독교 중심의 문명적 정체성과 각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이 동시에 형성된 시대로 정의했다. 저자들은 역사적 현장감을 살리면서도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며, 7개국 17곳의 상징적 장소들을 엄선해 소개한다.
권력과 신앙이 빚어낸 도시의 상징들
책은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성 야고보 조각상부터 시작해, 중세의 기억이 응축된 장소들을 다룬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유해가 에스파냐 서부로 옮겨지며 형성된 순례의 기점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지중해 상권을 장악했던 공화국으로, 9세기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해를 가져온 '성스러운 도둑질'을 통해 현재의 수호성인과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를 얻게 되었다. 13세기 초, 베네치아는 영토 확장의 기세와 함께 이 사자를 도시의 위엄을 드러내는 공식 상징으로 삼았다.
프랑스 북부의 랭스는 왕권과 종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중심지다. 1210년 화재 이후 더욱 화려하게 재건된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국왕들의 대관식이 열리던 곳으로, 이는 단순한 의례를 넘어 프랑스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초석이 됐다. 특히 프랑크 왕국의 시조 클로비스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이 도시가 지닌 역사적 무게를 더한다.
이주와 전쟁, 그리고 재해석된 역사
중세의 역사는 정치와 종교를 넘어 상업과 이주의 흐름으로도 읽힌다. 런던은 로마 시대 '론디니움'에서 시작해 템스강을 거점으로 성장했다. 앵글로색슨족의 정착 이후, 런던은 이탈리아와 유대인, 한자동맹 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적인 물류 거점이 되었다. 한편, 영국 헤이스팅스는 1066년 노르망디 군대의 침공으로 앵글로색슨 왕조가 교체된 결정적 격전지다. 이곳의 배틀 수도원은 당시의 전투를 기념하고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독일과 폴란드 접경지의 나움부르크는 역사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성당의 '우타 입상'은 11세기 귀족 부인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20세기 초 독일이 패전 후 민족적 자긍심을 찾으려 하는 과정에서 '시련을 견딘 독일 여성'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졌다. 이처럼 책에 등장하는 도시들은 권력, 신앙, 전쟁, 교역의 기억을 타임캡슐처럼 간직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