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책설' 무너뜨린 대법원의 실질적 판단 기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4년 8개월이 흐른 가운데, 사법 체계의 대전환이 중대재해 수사와 재판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최근 검찰청 폐지와 공소청 출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첫 양형기준안 발표 등 법적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법원의 최근 판결이 하급심의 기존 관행을 뒤흔들 변곡점으로 떠올랐다. <매일노동뉴스>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손솔 의원으로부터 확보한 공소장 235건과 1심 판결문 167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중대재해 처벌의 현주소가 드러났다.

그동안 법조계 일각에서는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를 선임했다면 대표이사는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이른바 '면책설'이 존재했다. 실제로 수원지법 여주지원은 지난해 12월, 이천 물류창고 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끼임 사고와 관련해 비앤더블유이앤씨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건설 경력 30년의 사내이사를 CSO로 임명해 안전보건 전결권을 부여했으므로 대표이사는 책임에서 벗어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최근 '아리셀 참사' 사건에서 이러한 논리를 부정하는 법리를 제시하며 상황이 반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CEO와 CSO의 책임 경계, '실질'이 가른다

대법원은 아리셀 사건을 통해 경영책임자의 범위를 새롭게 정의했다. 단순히 CSO를 임명했다는 사실만으로 경영책임자 의무가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조직 체계와 보고 경로, 그리고 대표이사의 실질적인 관여도를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CEO와 CSO 모두가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실질설'을 채택한 셈이다. 또한 위험성평가 역시 단순히 절차를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업장 특성에 맞춰 실질적으로 이행되었는지를 엄격히 판단하겠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대법원의 기준은 현재 진행 중인 수많은 사건에 직격탄이 될 전망이다. 분석 결과, 경영책임자 무죄 판결 17건 중 12건이 이번 대법원 법리와 맞닿아 있었으며, 이 중 10건은 현재 2심이나 대법원 심리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삼표그룹 회장이 경영책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1심 판결이나, CSO 체제를 근거로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금강공업 사건 등도 대법원의 새로운 기준에 따라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

양형기준 변화와 향후 사법적 과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향후 양형기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내년 3월 예정된 양형기준 수정안은 '재발 방지를 위한 실효적 조치'를 감경 사유로 검토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형식적 절차'가 아닌 '실질적 이행'을 강조함에 따라 그 판단 기준이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KCC건설이나 아이에스동서 등 대기업들이 위험성평가 절차를 근거로 무죄를 받은 사례들도 향후 실질적 이행 여부에 따라 재평가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하급심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조재민 변호사는 대법원이 채택한 실질설이 추후 상급심 판결을 상당수 변경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대형 로펌 관계자들 역시 예산 편성 및 비상 대응 매뉴얼의 실제 반영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대재해전문가넷 또한 사고 전 예방 체계가 실제로 작동했는지를 양형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실질적인 안전권 실현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