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멸의 현장에서 마주한 국가적 과제
지난주 전북 익산의 왕궁초등학교에서 열린 가을 운동회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깜짝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짐볼 옮기기 경기를 즐기고, 이어달리기 결승선에서 아이들을 응원하며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운동회 종료 후에는 아이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교사들과 소규모 학교의 중요성 및 지역 여건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러한 친근한 행보의 이면에는 인구 감소로 인한 지방 소멸이라는 무거운 국가적 숙제가 자리하고 있다.
대통령의 행선지는 곧 국정의 우선순위와 정책적 지향점을 시사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일주일 만인 지난해 6월 11일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주가조작 근절을 약속한 바 있다. 이어 올해 5월에는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조선업의 미래를 논의했으며, 지난 20일에는 인천 계양의 공공주택 건설 현장을 찾아 주택 공급 상황을 점검했다. 이처럼 취임 이후 그는 수십 차례에 걸쳐 다양한 현장을 직접 찾아왔다.
원전 현장 방문이 필요한 이유와 변화된 위상
이제는 국가 에너지 안보와 첨단 산업의 명운이 걸린 원전 현장으로 대통령의 발길이 이어져야 할 시점이다. 이 대통령은 경기도지사와 국회의원, 당 대표를 거쳐 국가 수반이 되기까지 원전 관련 현장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다.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중시해 온 진보 진영의 정책적 기조와 연결된 측면이 있으나, '모두의 대통령'을 표방한 만큼 특정 지지층의 이해관계에만 국한된 시각을 갖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원전 현장을 통해 국가 에너지 전략을 선포해 왔다. 1978년 고리 1호기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2010년 신고리 원전 현장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개최하며 원전을 수출 산업화하려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또한 신한울 1·2호기 준공 및 3·4호기 착공식에서 원전 생태계의 정상화를 역설했다. 탈원전 기조를 유지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해외 원전 건설 현장을 방문한 사례가 있다.
원전의 사회적 가치와 국민적 인식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의 지난 6월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9%가 신규 원전 건설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 원자력 발전량은 184.7TWh로 전체 발전량의 약 31%를 점유했다. AI 시대의 도래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된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조차 원전 활용을 재검토하고 있다. 한미 양국 간의 대규모 투자 협력에서도 원전 건설은 핵심 사업으로 다뤄지고 있다.
생존을 위한 선택, 에너지 실용주의로의 전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원전을 바라보는 지역 사회의 관점까지 변화시켰다. 경북 영덕의 경우, 신규 원전 유치를 통해 지역 생존을 도모한 끝에 부지로 최종 선정되었다. 과거에는 주민 반대가 극심했을 원전과 방사성폐기물 처리 시설이, 이제는 인구 감소와 지역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투자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에게 원전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지다. 대통령이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하는 것만으로도 방문의 가치는 충분하다.
대통령의 원전 현장 방문은 정치적 메시지로서도 유효하다. 탈원전을 지지하는 기존 지지층에게도 변화하는 에너지 현실을 직시하고 정책적 유연성을 수용하라는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용주의는 익숙한 환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불편해할 수 있는 현장까지 찾아가 현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증명된다.
현재 정부는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고자 원전 관련 공론화를 추진 중이며, 그 결과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될 예정이다. 시민참여단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은 특정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쟁점별 조건과 수준을 면밀히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통령의 방문 역시 결론을 유도하는 자리가 아니라, 원전의 가능성과 한계를 직접 살피며 국민적 합의를 책임감 있게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에너지 정책은 미래 세대의 산업 구조와 지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이다. 대통령이 원전 현장을 방문하여 전력, 산업, 지역 사회를 아우르는 '에너지 실용주의'를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원전에 대한 찬반을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잣대로 나누는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