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보호라는 명목 아래 사라진 삶의 질

모든 생명은 귀중하다는 명제는 당연해 보이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존재다. 미국의 생명윤리학자 조지 에이지치는 생명이 소중함을 잃어버리는 결정적 순간으로 '자기다움'이 파괴되는 억지스러운 생존을 꼽았다. 그는 삶의 질을 외면한 채 생명 자체에만 매달리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의 존엄과 행복 추구권을 명시하고 있으며, 생명 보호는 이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 그 자체에만 몰두하며 정작 살아있는 동안 누려야 할 가치들을 놓치고 있다.

예일대 켈리 세이건 교수는 죽음이 행복의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삶을 지속하려는 이유는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122세까지 생존했던 프랑스의 잔 칼망 사례처럼, 신체적 자유를 잃고 가족을 먼저 보낸 뒤 맞이하는 장수는 오히려 감옥 같은 삶이 될 수 있다. 아산정책연구원이 소개한 김석기 옹의 사례는 품위 있는 죽음의 모델을 보여준다. 96세에 거동이 불편해진 그는 인생의 과업을 마쳤다고 판단하자 스스로 병원을 거부하고 음식을 끊으며 의식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불가항력을 부정하는 현대인의 위험한 태도

윤리학자 대니얼 캘러핸은 삶의 과업을 완수하고 타인에게 과도한 절망을 주지 않는 '용납 가능한 죽음'의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소아암 환자나 젊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는 의료진에게 이러한 용납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호스피스 의사로서 마주하는 가장 힘든 지점은 비극적인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절대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마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듯 현대 의학에 무리한 솔루션을 요구하며 인간의 유한성을 거부하는 모습은 피조물로서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91세의 한 할머니는 자녀들과 떨어져 독립적이고 활기찬 삶을 유지해 왔으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까지 작성하며 평온한 마무리를 준비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암 판정 이후, 아들은 어머니의 평온한 퇴장을 거부하며 항암치료를 강요했다. 아들은 유튜브의 정보나 영양제에 의존하며 의사에게 끊임없이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는 인간의 몸을 개별 장기의 집합체로만 보는 '인수분해'식 사고방식에 갇혀, 수치 하나를 교정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이는 환자의 평온을 깨뜨리는 행위이자, 죽음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이 투영된 결과였다.

'당하는 죽음'의 시대, 회복해야 할 삶의 철학

과거에는 많은 이들이 집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으나, 현대 한국 사회의 죽음은 점차 '당하는 죽음'으로 변질되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찾아 헤매듯 인생을 허비하다가, 결국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경향은 삶의 가치관을 빈곤하게 만들고, 철학 대신 효율적인 생존 기술인 '일타'에 집착하게 한다. 대형병원의 명의를 일타강사처럼 추종하고, 드라마 속 천재 의사들이 죽음을 극복하는 판타지에 열광하는 현실은 우리를 환상 속으로 몰아넣는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두려운 것이며,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영생을 꿈꾸는 환상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불가항력적인 유한함을 인정하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비극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이를 후회 없는 삶으로 승화시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생의 숙제를 마친 뒤 의식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