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건의 추모 메시지, 다시 읽는 희생자의 삶
“주영아, 눈이 펑펑 내리니 우리 눈 오리 만들던 때가 떠오른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네 결혼을 앞둔 신랑도 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해. 널 붙잡지는 않을 테니, 부디 꿈속에서라도 찾아와 우리를 안아주렴. 그곳에선 부디 따뜻하게 지내길 바란다.”
이태원 참사로 딸 이주영 씨를 잃은 최진희 씨는 오빠가 작성한 편지를 낭독하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최 씨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 씨가 생전에 어떤 삶을 꾸려왔는지,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전했다. 이번 행사는 10·29 이태원 참사 4주기를 맞아 애도와 기억을 위한 낭독문화제 ‘당신과 만나게 하는 말들’로 진행되었다.
29일 저녁 7시 30분경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 광장에서 열린 이번 문화제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유가족협의회, 그리고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행사의 주관은 시민대책회의 산하 피해자권리위원회 기록보존팀이 맡았다. 이번 자리는 참사 이후 4년 동안 현장과 분향소에 시민들이 남긴 약 10만 건의 추모 메시지를 기록물로 정리해 함께 읽기 위해 마련되었다. 유가족과 지인, 생존자, 구조자, 그리고 다른 재난의 유가족들과 연대해 온 시민들이 한데 모여 희생자를 기리고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나누었다.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유가족의 발언에 함께 눈물을 흘리거나 박수로 응답하며 추모의 뜻을 함께했다.
멈추지 않는 고통, 제도 밖의 외침
지난 6월 행정안전부가 160번째 희생자로 인정한 고(故) 백형준 씨의 이야기도 울림을 주었다. 이태원 상인이었던 백 씨는 참사 당시 적극적으로 구조 활동에 임했으나, 이후 트라우마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이날 행사에서는 백 씨의 여동생이 쓴 편지를 장예정 차별금지법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 대신 낭독했다. 백 씨의 여동생은 편지를 통해 참사로부터 4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국가와 사회가 조금 더 일찍 오빠의 아픔을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전하며, 오빠의 헌신적인 행동이 제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한 피해자와 구조자들이 제도적 사각지대에서 홀로 아파하지 않도록 국가의 책임 있는 지원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어 “사랑하는 오빠 백형준이 이제는 모든 아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히 쉬기를 바란다”며 “사람들을 살리려 내밀었던 오빠의 따뜻한 손길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유가족이 전하는 마지막 인사와 삶의 의지
참사 직후 유가족들이 남긴 절절한 기록들도 공개되었다. 희생자 이상은 씨의 부친 이성환 씨는 딸의 장례를 치른 뒤 일주일간 현장에서 써 내려간 편지를 읽었다. 이 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합격 소식을 전하며 울먹이던 딸의 목소리가 휴대폰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회상하며, 딸이 꿈꾸던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바로 다음 날 딸을 떠나보내야 했던 원통함을 토로했다. 그는 딸을 품에 안았던 첫 순간의 온기를 떠올리며, 이제는 재가 된 딸을 가슴에 안고 보내주려 한다고 말했다.
신애진 씨의 부모인 김남희 씨와 신정섭 씨는 친구가 보낸 편지를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편지에는 죽음을 외면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너를 계속 그리워하며, 네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믿겠다는 담담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한편, 안지호 씨의 어머니 유하임 씨는 참사 이후 남편까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유 씨는 “나를 보러 올 때 웃어달라”는 딸의 묘비명을 언급하며, 딸을 웃으며 만나기 위해 남은 삶을 충실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행사가 마무리된 후, 유가족과 시민들은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방향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온기가 오가기도 했으나,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유가족은 골목 한편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고, 시민들은 포스트잇에 각자의 추모를 담아 현장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