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양보다 중요한 '판단하는 눈'

전통적인 사회에서 전문성은 학력과 경력, 그리고 특정 분야에서 쌓아온 오랜 경험의 축적을 의미했다. 지식이라는 거대한 산의 정상을 향해 수십 년간 정진한 이들이 전문가로 대우받는 것이 당연한 질서였다. 그러나 스스로 과업을 수행하는 에이전틱 AI의 등장으로 이러한 기존의 문법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과업들을 이제 AI를 통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문성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습득하고 활용하는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의 박현우 교수는 최근 진행된 SK 청년 인재 육성 프로그램인 ‘SK아이젠(AIGEN)’ 설명회에서 인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정형화된 전문가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기술과 기회를 남보다 먼저 포착해 활용하는 ‘울퉁불퉁한 고수’가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AI가 지능을 마치 수돗물처럼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면서 사람의 역량은 AI가 도출한 결과물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완성도 있게 끌어올리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 교수는 AI가 결과물의 약 60~70%를 빠르게 생성할 수는 있어도,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우수한지 가려내는 안목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미켈란젤로의 비유를 들어, AI가 누구에게나 조각가의 '손'을 빌려줄 수는 있지만, 좋은 작품을 식별하는 '눈'은 개인의 호기심과 취향, 그리고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덧붙였다.

하드웨어 대신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로 승부하는 전략

변화하는 산업 지형은 실제 기업들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13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과학·공학 유튜브 채널 '긱블'을 운영하는 루드다이나믹스의 박찬후 대표(30)는 로봇 사업을 통해 이러한 흐름을 증명하고 있다. 이 회사는 로봇을 직접 제조하는 대신, 기존의 기체에 자체적인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역발상 전략을 구사한다. 로봇 원가의 약 70%를 차지하는 액추에이터(구동장치)의 높은 비용 부담을 고려할 때, 직접 하드웨어를 개발하기보다는 이미 시장에 출시된 로봇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이다. 향후 액추에이터 가격이 충분히 하락하면 자체 기체 개발에 나설 계획을 가지고 있다.

대신 루드다이나믹스는 운영 플랫폼인 ‘록스(LOX)’와 캐릭터 에이전트 ‘루카(LUCA)’ 개발에 집중하며, 이를 중국 하이토크 로보틱스의 소형 로봇을 시작으로 유니트리 등 다양한 기기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10년간 축적된 콘텐츠 제작 노하우를 로봇에 이식했다. 로봇이 넘어졌을 때 고장으로 숨기는 대신 “나 좀 일으켜줘”라고 말하는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한 하드웨어 성능 경쟁을 넘어 소프트웨어와 콘텐츠가 결합된 새로운 고객 경험을 창출하려 한다. 이는 자신들이 강점을 가진 영역을 통해 기존 로봇 산업의 경쟁 방식을 재편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낡은 잣대에 가로막힌 새로운 가능성

그러나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과거의 규범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 AI 스타트업 아스테로모프를 이끄는 이민형 대표(25)를 향한 학력 및 경력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1년생인 이 대표는 검정고시를 거쳐 독학학위제와 학점은행제로 컴퓨터공학 학사를 취득했으며, 만 16세에 서울대 의대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현재는 서울대 의과대학 대학원 의과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의과학과는 의사 면허 취득을 위한 학부 과정과는 별개인 연구 중심 과정으로, 그의 대학원 입학과 연구소 근무 사실은 증빙을 통해 확인되었다. 과학기술정보통부 역시 K-문샷 프로젝트 PD 지원 당시 제출된 서류에 문제가 없음을 공식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지속되었으며, 이 대표 측은 관련 증명서를 공개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진행했다.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해 이의 신청이 접수되면서 사건은 검찰로 송치되었고, 향후 사법적 판단을 기다리는 상태다. 공적 인물의 이력 검증은 중요하지만,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는 인재를 의심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아스테로모프는 기존 AI 모델에 과학적 추론 기술을 결합하는 데 주력하며 산업은행으로부터 450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하는 등 기술력을 입증해왔다. 기업의 성과는 기술과 사업성을 바탕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새로운 경로를 걷는 창업가를 과거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AI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

스펙보다 '야생의 근육'을 키우는 인재 육성

산업계에서는 인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SK그룹이 11월 1일부터 시작하는 청년 인재 육성 프로그램 ‘SK아이젠’이 그 예다. 이 프로그램은 2027년 3월까지 만 19~34세 청년 50여 명을 선발해 약 22개월간 AI 기반 문제 해결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참여자에게는 매월 300만 원의 지원금이 지급된다. 특이한 점은 학점, 자격증, 전공 여부 등을 필수 조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상규 SK mySUNI 총장은 설명회에서 안정적인 대기업 취업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프로그램이라고 밝히며, 취업용 스펙 쌓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파고드는 힘을 기르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선발의 핵심 기준은 호기심과 실행력, 그리고 문제의식이다. 기술이나 창업뿐 아니라 문화예술, 스포츠, 사회적 이슈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를 활용한 해결책을 도출하도록 독려한다. 이는 AI에게 정답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인지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다. 지식을 쌓는 노력은 여전히 가치 있지만, 이제 그 길은 다양해졌다. AI를 도구 삼아 낯선 영역에 뛰어들어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이들이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인재는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라, AI와 협력해 남들이 보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미켈란젤로의 손을 가졌다면, 이제는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눈을 길러야 하며, 그 눈은 직접적인 경험과 실패를 통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