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전성기 넘어 세계 최초 2000승 고지 점령
바둑판이라는 19줄의 전장 속에서 '이창호'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1990년대 전성기 시절, 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방망이를 휘두르듯 상대방이 패배를 인지하기도 전에 서서히 압도하며 적수들을 무너뜨렸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2026년 10월 26일, 이창호 9단은 다시 한번 역사에 남을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그는 세계 최초로 통산 2000승(2000승 1무 830패, 승률 70.7%)을 달성하며 불멸의 기록을 써 내려갔다.
11세에 프로로 입문해 14세에 국내 첫 우승, 16세에 세계 대회 정상에 오르며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던 그는 이제 50대에 접어들어 또 다른 전설을 만들었다.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개최된 2026 레전드리그에서 최명훈 9단을 상대로 불계승을 거두며 마침내 2000승이라는 거대한 이정표에 도달한 것이다. 대국 직후 만난 이창호 9단은 바둑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뜻깊은 하루라며 소감을 전했다.
'신산'이라 불린 소년, 그리고 학문을 향했던 갈망
어린 시절의 이창호는 놀라운 계산력을 바탕으로 마치 'AI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100수 앞을 내다보며 반집 승부를 결정짓는 그의 능력에 사람들은 '신산(神算)'이라는 경외 섞인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세계 바둑계는 인생의 깊이를 모르는 소년이 바둑을 제패하는 현상에 주목하며, 이것이 바둑의 가치를 흔드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9단은 40세 명인이 경륜과 깨달음을 갖춘 존재라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체력이 경륜보다 앞서는 부분이 있음을 언급하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설명했다.
그의 삶에는 바둑 외에도 독특한 이력이 존재한다. 1993년 러시아 볼가강 유람선에서 열린 조훈현 9단과 이창호 6단의 선상 대국 당시, 그는 수능시험을 치르기 위해 홀로 귀국할 만큼 학업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당시 선배들의 만류로 수능을 치르지는 못했으나, 그는 과거 막연하게나마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공부에 매력을 느꼈던 인물이다. 독서 역시 단순한 취미를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활용해왔다.
AI 시대의 도래와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
강수를 억제하고 두터움을 중시하며 '느린 바둑'으로 스피드 시대를 정복했던 이창호는 이제 인공지능(AI)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과거 금기시되었던 '삼삼 침입'과 같은 변화에 대해 그는 처음 2~3년 동안 회의감과 방황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현재는 AI가 보여주는 5선의 어깨 짚기 같은 놀라운 수들을 보며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긍정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강자로 군림하는 신진서 9단의 바둑에 대해서도 그는 AI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신진서가 AI의 기술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과 두터움으로 판을 짜 나가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창호 9단은 올해 30승 14패를 기록하며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인공지능으로 인해 변화한 바둑의 시야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AI는 침략자인가, 조력자인가
인간이 5,000년 동안 일궈온 바둑이라는 영역에 나타난 AI를 두고, 누군가는 파괴적인 침략자로, 누군가는 재미를 앗아가는 방해꾼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이창호 9단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에 그는 한참의 고민 끝에 '조력자'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는 변화하는 기술을 통해 바둑의 수준을 높이고 새로운 경지를 열어갈 수 있다는 그의 철학적 선택이자, 인공지능과 공존하며 바둑의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긍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