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주도로 시작된 화학 기술의 국산화 여정

한국화학연구원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거둔 연구 성과를 대중에 공개했다. 1976년 당시 136개 민간 기업이 출연금을 모아 설립한 '민간 주도형' 연구소인 화학연은, 표백제 개발부터 에이즈 치료 신약 발굴에 이르기까지 국내 화학 기술의 자립을 이끌어온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던 1976년 당시, 급증하는 기술 수요에도 불구하고 핵심 소재와 기술은 대부분 외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17개 기업이 화학 기술의 자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136개 기업을 대표해 한국화학연구소를 공식 출범시켰다. 서울 종로구의 작은 임시 사무실에서 첫걸음을 뗀 연구소는 이듬해 대전 대덕으로 이전했으며, 창립 당시 근무 인력은 단 18명에 불과했다.

표백제와 폴리부텐, 기술 전수의 정신을 실천하다

연구소의 초기 대표적 결실은 산소계 표백제 개발이다. 한국화학연구원의 기록에 따르면, 1979년 동양화학의 이회림 회장이 2,600만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개발을 의뢰했고, 화학연은 이듬해 1월 한국형 표백제를 완성해냈다. 이 제품은 붕소와 같은 환경 오염 물질을 배제하면서도, 삶지 않아도 삶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발생기 산소' 원리를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1984년 '옥시크린'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기술은 수십 년간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특히 화학연은 기술을 동양화학에 이전하면서도 '모든 성과는 전수한다'는 설립 정신에 따라 단 한 푼의 기술료도 받지 않았다.

1987년 물질특허 제도가 도입되며 맞이한 위기 속에서 화학연은 독자 개발로 돌파구를 찾았고, 그 결과물이 바로 폴리부텐이다. 접착제, 연료 첨가제, 윤활유 등에 쓰이는 이 소재는 한국이 매년 800만 달러어치를 수입해야 했던 품목이었다. 10여 년간의 연구 끝에 1994년 독자 생산 기술을 완성하여 대림산업에 이전함으로써 수입에 의존하던 폴리부텐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과는 대한민국 100대 기술에 선정되었으며, 국립중앙과학관의 국가 중요 과학기술자료로도 등재되었다.

에이즈 치료제와 제초제, 글로벌 시장을 향한 도약

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 분야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냈다. 손종찬·이일영 박사팀은 1995년부터 관련 연구에 착수했으며, 2006년 미국의 글로벌 제약사인 길리어드 사이언스와의 공동 연구를 거쳐 2008년 치료제 후보물질을 찾아냈다. 기술을 이전받은 카이노스메드는 환자 증가율이 높은 중국 시장을 겨냥해 2014년 중국 제약사 장수아이에 판권을 넘겼다. 이후 중국 내 임상 과정을 거쳐 2021년 6월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의 판매 허가를 획득하며, 아시아 최초로 에이즈 치료 신약을 독자 개발해 상용화한 사례를 기록했다.

해외 시장으로 뻗어 나간 성과는 제초제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고영관 박사팀이 국내 기업인 팜한농과 공동으로 개발한 비선택성 제초제 '테라도'는 기존 제품보다 최대 10배 빠른 약효를 자랑한다. 2018년 출시된 테라도는 28개국 이상에서 특허를 확보했으며, 2020년에는 미국 시장 진출에도 성공했다.

인공지능 기반의 '2040 비전' 선포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화학연은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중심의 연구 체계 전환을 골자로 하는 '2040 비전'을 발표했다. '세상이 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화학으로 답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신석민 원장은 연구원이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적·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고 한국 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추 역할을 해왔다고 강조했다. 신 원장은 앞으로 화학 기술 전문 글로벌 최고 연구 기관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8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화학연은 현재 대전 본원을 비롯해 울산과 여수 거점에서 1,600여 명의 전문가가 근무하는 국내 유일의 화학 전문 연구소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