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술 집중에 밀려난 기초연구 지원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이 전년 대비 11.2%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기초연구사업의 핵심연구 과제 규모는 올해보다 30% 이상 축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예산 편성이 인공지능(AI)과 같은 전략기술 분야에 집중되면서 기초과학 연구를 위한 재원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결과다. 학계에서는 지난 정부의 예산 삭감 충격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금 연구 현장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과학계에 따르면, 내년 기초연구사업의 중추를 담당하는 핵심연구 신규 과제는 총 1595개로 집계됐다. 이는 올해 2438개였던 과제 수와 비교했을 때 34.6%나 급감한 수치다. 핵심연구는 국내 대학 교수와 연구자들이 연구실을 운영하는 데 가장 크게 의존하는 기반 과제로, 과제 수의 감소는 곧바로 연구 현장의 운영 차질로 이어진다.

연구실 운영 위협하는 핵심연구 과제 대폭 감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연간 1억 원을 지원하는 유형 A는 1209개에서 825개로 31.8% 줄어들며, 2억 원을 지원하는 유형 B는 37.4% 감소한 670개로 편성된다. 또한 3억 원을 지원하는 유형 C 역시 37.1%의 감소 폭을 보였다. 기존 과제를 마친 연구자 중 30% 이상이 신규 과제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서, 기존에 진행하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할 위기에 직면했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오경수 교수는 핵심연구가 주로 중견 연구자들의 신청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과제 감소로 인해 일부 연구실이 규모를 축소하거나 연구 기회 자체를 상실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 교수는 연간 5000만 원 규모의 기본연구 과제가 존재하지만, 이는 연구실의 유지에만 급급한 수준이라 의미 있는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핵심연구 과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신규 과제 수급 실패는 박사후연구원과 대학원생들의 인건비 문제로 직결된다.

부산대학교 물리학과 유인권 교수 또한 핵심연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사실상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번 과제 수 감소를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규정했다. 그는 3년 전 무너진 연구 생태계가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이번 충격에 대해, 한국 과학계에 대한 장기적 투자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상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과기정통부의 해명과 기초과학연구원의 예산 삭감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늘어난 핵심연구 과제들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신규 과제 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핵심연구 과제는 보통 3~5년간 지속되는 특성이 있어, 기존 과제를 이어가는 데 상당 부분의 예산이 편성되었다는 설명이다.

기초과학 연구 예산의 감소세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사례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IBS 연구단 운영 예산은 올해 1474억 원에서 내년 1399억 원으로 5.4% 감소할 예정이다. 연구단 수가 늘어나는 추세임에도 전체 예산 규모가 줄어들면서, 개별 연구단에 배정되는 예산은 훨씬 더 큰 폭으로 깎이게 된다. 한 연구단장은 피해가 심한 곳은 예산이 20% 가까이 삭감되었다고 밝히며, 외부 과제 수주가 어려운 연구단 특성상 예산 삭감의 여파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고 전했다. 특히 비정규직인 박사후연구원과 학생들의 인건비 문제가 가장 큰 불안 요소로 꼽힌다.

전략기술 편중 현상과 연구 현장의 사기 저하

이번 예산 구조의 핵심 문제는 전략기술 분야로의 자원 집중이다. 내년도 AI 분야 예산은 69.1%, 원자력 등 미래에너지 분야는 37.7%나 증액된 반면, 기초연구 예산은 5.9% 증가에 그쳐 주요 분야 중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기술 투자도 중요하지만 기초연구 예산이 소외되는 상황에 아쉬움을 표하며, 매년 노벨상 시즌에만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연구 현장의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