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아산 거리에서 마주한 낯선 얼굴

1954년, 학교 수업을 마친 금자는 길가 담벼락에 붙은 민의원 선거 벽보를 지나치다 멈춰 섰다. 아홉 장의 포스터 중 유독 한 인물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서용길'이라는 이름과 함께 적힌 얼굴은 금자가 분명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헌국회의원이자 반민특위 특별검찰관이었던 서용길(1912~1992)이었다.

과거 서울 명동에 거주할 당시, 금자는 아버지 강욱중의 심부름으로 내수동에 있는 서용길의 자택에 여러 차례 편지를 전달한 적이 있었다. 금자는 아버지가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투옥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용길 역시 전쟁과 함께 북한으로 떠났을 것이라 확신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달리, 선거에 출마해 남쪽에 멀쩡히 살아있는 그의 모습은 금자에게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버텨낸 생존의 기록

당시 15세였던 금자는 아산 온양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는 북한 요원에게 납치되었고, 어머니는 남한 공안 당국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12살 무렵 세 명의 남동생을 데리고 부산 고모부 집으로 피난을 떠났던 금자는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3년 전 아산의 후생보육원에 정착했다. 두 오빠와 동생 호림이와는 연락이 끊긴 상태였으며, 함안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조차 답장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한 서용길의 포스터는 금자에게 기이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서용길은 북으로 가지 않았다.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기소된 13명의 제헌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남쪽에 잔류한 인물이었으나, 어린 금자는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성균관대 교수 시절 제자의 친척인 경기 벽제 농가로 몸을 숨겨 납북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 수복 과정에서 검찰청에 자진 출두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주변의 도움으로 1951년 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회프락치 사건의 항소심에서도 재판부는 전쟁으로 인한 기록 멸실을 이유로 서용길을 포함한 피고인 전원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형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피선거권에도 문제가 없었다. 서용길의 고향인 아산은 그가 1948년 총선에서 젊은 나이에 당선되며 정치적 야망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엇갈린 운명과 33년 만의 재회

가족과 헤어져 홀로 보육원 생활을 하던 금자에게 서용길은 마치 혈육 같은 반가움을 주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서용길에게 투영되었지만, 중학생이었던 금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용길은 1954년 선거에서 7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33년이 흐른 1987년에야 비로소 재회했다. 당시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시절, 금자는 제헌동지회를 통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을 취했다.

서용길은 금자에게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고아가 된 후 부모님 이야기를 유일하게 나눌 수 있었던 어른이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시되었으나, 서용길 앞에서는 가능했다. 종로의 한 설렁탕집에서 만난 그는 금자의 사정을 위로하며, 자신이 겪은 고초와 국회프락치 사건의 조작 사실을 단호하게 밝혔다. 그는 1967년까지 세 차례 더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잊혀진 진실을 향한 여정

서용길의 부인 이영란은 1998년 한겨레신문 인터뷰를 통해 남편의 꿈이 사건의 조작을 밝히는 것이었음을 전했다. 금자는 44년 전 아산에서 포스터를 보았던 기억만큼이나, 신문에서 이 기사를 마주한 순간이 비현실적이었다고 회상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국회프락치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제헌국회의원들의 자녀들은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등을 통해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13명의 의원 중 여전히 절반이 넘는 7명의 자녀는 연좌제의 그늘 아래 숨어 있다. 이들은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는가. 이번 연재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노일환의 후손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