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유지 위한 '디지털 약탈'의 실체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발생한 8조 4,000억 원 규모의 해킹 사건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되면서, 정권의 핵심 외화 확보 수단으로 변질된 해킹 산업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 속에서 북한 정권이 체제 유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커들을 조직적으로 육성하고 가상자산을 탈취해 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블록체인 분석 전문 기업인 체이널리시스의 지난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북한과 연계된 해커 집단이 가로챈 가상화폐는 약 20억 달러(한화 약 2조 9,000억 원) 규모로 집계되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발생한 가상자산 탈취 총액 중 무려 60%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히 이번 바이낸스 사태의 피해액인 63억 달러(약 8조 4,000억 원)는 북한의 국민총소득(GNI) 대비 약 5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진화하는 해킹 수법과 국가 주도 양성 체계
북한의 가상자산 탈취 행위는 일시적인 범죄를 넘어 정권의 핵심적인 외화 수입원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전문가 패널의 보고서에 의하면, 2017년부터 2023년 사이에 확인된 북한의 가상화폐 관련 기업 공격은 총 58건이며, 이로 인한 피해액은 30억 달러에 이른다. 전문가 패널은 이러한 해킹 수익이 북한 전체 외화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며,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의 약 40%를 충당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북한의 불법 자금 조달 방식은 시대적 흐름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1990년대 100달러 위조지폐인 '슈퍼노트'를 제작하던 방식에서 2000년대 마약 밀매를 거쳐, 2010년대 소니 픽처스 해킹 사건 이후에는 가상화폐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라자루스 등 북한 해킹 조직은 로닌 네트워크(약 8,000억 원), 바이비트(약 2조 원), DMM비트코인(약 4,000억 원) 등을 연이어 공격해 거액을 빼앗았다.
AI 기술 결합으로 더욱 강력해진 사이버 위협
이러한 치밀한 공격은 국가 차원의 엘리트 해커 양성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북한은 수학과 과학 분야의 영재들을 조기에 발굴해 훈련시킨 뒤 모란봉대학 같은 전문 기관으로 보내며, 정예 요원들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위탁 교육을 받기도 한다.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처벌에 대한 부담 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외 해커들보다 훨씬 대담한 행태를 보인다.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해커들을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 정권의 외화벌이에 투입되는,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숙련된 사이버 행위자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까지 해킹에 접목되면서 위협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사이버보안업체 스텔스몰의 사이먼 최 최고기술책임자(CTO)는 AI가 해커들이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고 공격을 자동화하는 과정을 돕고 있다며, AI가 해커들에게 강력한 날개를 달아준 격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