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침묵을 깨고 드러난 역사적 책임

한 백인 여성이 평생 헌신한 흑인 가사 도우미에게 집 한 채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여성이 사망한 뒤 남겨진 가족들은 그 약속을 외면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격변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무려 30여 년이 지나서야 이 약속은 이행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 데이먼 갤것(63)이 2021년 부커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장편소설 '약속'이 그려내는 비극적인 서사다.

제15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갤것은 2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문학적 고뇌를 털어놓았다. 그는 역사적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오직 사랑만을 노래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면서도, 인간은 결코 사회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며 역사의 궤적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동시에 고백했다. 평생 남아공의 인종차별과 불평등을 문학으로 다뤄온 그에게 정치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끝나지 않은 혁명, 경제적 불평등의 그림자

1963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가 지배하던 남아공에서 태어난 갤것은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제도적 인종차별이 종식된 과정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변화를 '절반의 혁명'이라 명명하며 냉철하게 진단했다. 법적 평등은 확보되었을지언정, 부의 편중과 사회적 부정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 계층은 여전히 부를 독점하고 흑인들은 빈곤의 굴레에 갇혀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경제적 소외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해방은 미완의 상태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작품 '약속' 속 스와트 가족의 몰락을 통해 구체화된다. 프리토리아 외곽에 거주하는 이 백인 가족은 흑인 가정부 살로메에게 땅과 집을 주기로 약속하지만, 세대교체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 책임을 끊임없이 떠넘긴다. 갤것은 이 이야기가 실제 지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며, 정치적 상징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인물을 특정 정치적 입장의 대변자로만 규정하지 않고, 그들이 마주하는 도덕적 모호성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집필 방식이다.

선악의 경계를 넘어 던지는 문학적 질문

갤것은 문학이 명확한 권선징악이나 정답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인물들의 불완전하고 모호한 선택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2003년 부커상 최종 후보작인 '굿 닥터'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드러난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쇠락해가는 시골 병원을 배경으로, 이상주의적인 의사 로런스와 냉소적인 프랭크의 갈등을 통해 변화에 대한 낙관과 환멸을 동시에 탐구했다. 1982년 '죄 없는 계절'로 데뷔한 이후 그는 꾸준히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단은 갤것이 특정 지역의 역사를 넘어 정의와 책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끈질기게 질문해 온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 사회의 실패를 낙관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인간의 책임을 추궁하는 그의 태도가 문학적 성취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한편,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AI가 정형화된 장르 소설은 쓸 수 있어도, 인간의 고통과 내면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영역은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앤트로픽의 저작권 침해 논란과 관련해 자신의 작품 또한 이용된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인간 문학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박경리 탄생 100주년, 문학의 마법을 만나다

올해는 박경리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로, 이번 시상식은 29일 오전 11시 30분 강원도 원주 호텔인터불고에서 개최된다. 갤것에게는 상장과 상패, 그리고 1억 원의 상금이 수여될 예정이다. 그는 31일 원주 박경리문학공원에서 한국 독자들과 함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마법: 책의 목소리'라는 주제로 특별한 만남을 가질 예정이며, 오는 11월 3일에는 서울에서 문학 대담을 이어가며 독자들과 소통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