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특례 대신 실적 기반의 일반상장 선택
성장 가능성과 기술력은 물론, 구체적인 경영 성과를 무기로 증권시장에 도전하는 스타트업들이 늘고 있다. 과거 기술 특례나 성장성 특례를 통해 상장을 추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매출과 영업이익 등 실질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일반상장을 노리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벤처투자 시장과 주식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기업용 생성형 인공지능(AI) 솔루션을 제공하는 제논은 지난 8일 금융위원회에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며 일반상장을 위한 공모 절차를 시작했다. 희망 공모가는 주당 9,700원에서 12,200원 사이로 책정되었으며, 총 공모 예정 금액은 213억 4,000만 원에서 268억 4,000만 원 규모다. 삼성증권이 상장 주관을 맡았으며, 기관 대상 수요예측은 2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다. 이후 일반 투자자 대상 청약은 다음 달 4일과 5일에 걸쳐 실시될 예정이다.
2017년 문을 연 제논은 자체 개발한 엔터프라이즈 AX 플랫폼인 '제노스'를 통해 기업의 AI 전략 수립부터 모델의 도입 및 운영까지 전 과정을 지원한다. 현재 금융과 공공, 발전 분야에서 탄탄한 고객층을 확보한 상태이며, 제조 및 제약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 중이다. 재무 지표 또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2024년 매출 86억 3,000만 원과 영업이익 10억 2,000만 원을 기록한 뒤, 지난해에는 매출 117억 4,000만 원에 영업이익 7억 원을 달성하며 2년 연속 흑자 기조를 유지했다.
특히 올해 상반기 별도 기준 매출은 117억 6,000만 원으로, 전년 동기(27억 3,000만 원) 대비 약 4.3배 급증하며 반년 만에 지난해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영업이익 역시 22억 원을 기록해 지난해 전체 이익의 3.1배에 달하며 18.7%의 영업이익률을 보였다. 고석태 제논 대표는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쌓은 프로젝트 경험과 자체 플랫폼을 바탕으로 기업의 실질적인 AX를 돕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번 공모를 통해 AI 에이전트 및 피지컬 AI의 상용화와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제논은 지난 8월 한국거래소에 코스닥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해 심사가 진행 중이며, 미래에셋증권과 하나증권이 각각 대표 및 공동 주관사를 맡았다.
인도 시장 잡은 핀테크 기업 어피닛의 도전
인도 시장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핀테크 기업 어피닛 역시 일반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인도 중앙은행(RBI)의 인가를 받은 비은행금융회사(NBFC) 자회사를 통해 모바일 금융 플랫폼 '트루밸런스'를 운영하는 이 회사는 자체 개발한 대안신용평가시스템(ACS)을 핵심 경쟁력으로 꼽는다. 금융 이력이 부족한 '신파일러'를 대상으로 스마트폰에 남겨진 9만 개 이상의 비금융 데이터를 정밀 분석해 대출, 보험, 신용카드 등 금융 서비스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어피닛의 실적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해 K-IFRS 기준 매출 1,691억 원, 영업이익 449억 원을 달성했으며, 세전이익률은 23.5%(세전이익 397억 원)에 달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매출 1,123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8% 성장했고, 영업이익은 296억 원으로 79.4% 증가하며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2022년부터 꾸준히 흑자를 유지해 온 어피닛이 연간 매출 1,000억 원 상회와 수백억 원대 이익을 바탕으로 일반상장에 나서는 것은 흔치 않은 사례다. 특히 국내 기업이 인도 현지에서 성과를 내며 코스닥에 입성하는 첫 사례가 될 수 있어 주목받고 있다. 지난 23일 한국거래소에 코스닥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한 어피닛은 심사 통과 시 연말이나 내년 초쯤 증시에 상장될 것으로 보인다.
재무 구조 개선으로 방향 선회한 에버스핀
보안 솔루션 기업 에버스핀은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반상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2021년 성장성특례로 상장을 시도했으나 당시 매출 6억 원대의 적자 상태를 이유로 예비심사를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국내외 금융권 고객을 넓히며 재무 건전성을 확보한 에스핀은 이번에 일반상장으로 다시 도전한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134억 6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56.5% 늘었으며, 영업이익은 48억 6,900만 원으로 약 9배, 당기순이익은 73억 3,700만 원으로 약 6배 급증했다. 영업이익률은 36.3%에 달한다.
에스핀의 주력 제품은 MTD(이동표적방어) 기술을 적용해 보안 모듈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에버세이프'와 화이트리스트 방식으로 악성 앱을 잡아내는 '페이크파인더'다. 구독형 라이선스 모델을 통해 반복적인 매출을 창출하는 구조를 갖췄다. 고객 증가에 따른 비용 상승폭보다 매출 성장이 앞서는 영업레버리지 효과 덕분에 이익이 매출보다 빠르게 늘어나는 특징이 있다.
리벨리온, 코스피와 코스닥 사이의 선택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은 상장 전략을 재검토 중이다. 당초 연내 공모 마무리를 목표로 했으나, 국민성장펀드 투자처 선정 등의 영향으로 일정이 조정됐다. 현재 리벨리온은 상장 시장을 두고 한국거래소와 협의 중이며, 4분기 내 예비심사 신청을 계획하고 있다. 초기에는 코스피와 일반상장을 우선 고려했으나, 최근에는 코스닥 상장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다. 특히 시가총액 1조 원 이상 기업에 적용되는 코스닥 기술특례 제도를 활용해 사전 기술평가를 생략하고 바로 예심을 청구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현재 재무 상태만 보면 코스닥이 유리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해 연결 매출 320억 2,000만 원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용 증가로 인해 1,204억 6,000만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내년 상반기 코스피 상장 의지를 피력한 바 있고, 글로벌 재무적 투자자들 역시 코스피 입성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벨리온 측은 구체적인 상장 방식과 시기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벤처투자 업계는 기술 스타트업들이 '기술력'을 넘어 '수익 창출 능력'을 증명하며 상장 시장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