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미터 지하의 역사가 담긴 암석과 기록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시추 코어 보관 선반’에는 지하 수백 미터 깊이에서 채취한 암석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지층마다 각기 다른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이 암석들과 더불어, 연구실 곳곳에는 선배 연구자들이 직접 산을 오르며 작성한 지질도와 야외 조사 기록들이 남아 있다. 누군가 직접 망치로 암석을 깨뜨리며 땅의 역사를 확인해온 이 소중한 흔적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것이 단순한 과거의 유물인지 아니면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미래의 자산인지 고민하게 된다.
한반도의 근대 지질조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자원 수탈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와 맞물려 시작되었다. 1918년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가 세워지며 체계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1924년에는 국내 최초로 1 대 5만 축척의 지질도가 세상에 나왔다. 이후 약 100년의 세월 동안 국가기본지질도 제작은 계속되었으며, 지난 9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남한 지역의 1 대 5만 축척 ‘국가기본지질도 357도엽’을 모두 완성했다. 이는 수많은 연구자가 전국의 산과 계곡을 누비며 수행한 현장 조사의 결실이 국가지도로 집약된 결과다.
파편화된 지질 데이터의 한계와 국가적 손실
지질도에는 지층의 분포와 암석의 종류, 단층 및 습곡 같은 지각 구조가 상세히 기록된다. 이러한 정보는 지진이나 산사태, 지반침하에 대응하고 댐이나 터널의 안전성을 검토하며, 광물 자원과 지하수를 탐색하는 모든 기초 작업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지질도 완간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시추나 연구가 진행될 때마다 내용이 갱신되는 ‘살아 있는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십 년간 쌓인 귀중한 자료들이 종이 도면이나 보고서, 개별 연구 과제의 결과물로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표준화되지 않은 채 공개되지도 않은 자료들은 후속 연구자들이 그 존재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민간 건설사나 공공기관의 사업 현장에서도 매년 대규모 시추와 지반 조사가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개별 사업 단위로만 관리되어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축적에는 실패하고 있다. 한 번 확보하면 수백 년간 활용할 수 있는 땅속 정보가 단절되고 사장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이를 공공 인프라로 관리한다. 영국지질조사소(BGS)는 국가지질자료센터를 통해 민간의 시추 기록까지 수집·공개하며, 광물 탐사용 30m 초과 시추 시 자료 기탁을 법으로 규정한다. 미국지질조사소(USGS) 또한 연방과 주 정부가 협력해 표준화된 지질 자료를 구축하고 관리한다.
디지털 전환과 3차원 지질 정보 체계 구축
이제는 지질 자원 자료를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데이터의 진정한 가치는 축적이 아닌 활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형태의 오래된 자료들을 표준화된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하여, 지질 전문가뿐만 아니라 지자체, 기업, 일반 국민까지 누구나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는 통합 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정비된 데이터는 인공지능(AI) 기술과 결합해 지하 구조를 정밀하게 해석하고 자원 유망지를 예측하는 혁신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2차원 지질도를 넘어 땅속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3차원 지질 자원 정보 체계로의 진화는 축적된 자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길이다.
국토의 안전을 보장하고 자원 안보와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핵심은 우리 발밑의 땅속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 100년간 쌓아온 땅의 기록을 미래 세대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국가 자산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지금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과제다. 박계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자원융합지식본부장은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