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의 저점 찍고 반등한 원화 실질가치

지난 8월과 9월, 원화의 실질적인 가치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린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6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7년여 만에 최저치까지 추락했던 원화 실질가치는 이후 석 달 동안 11.7%라는 급격한 상승 폭을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이러한 반등의 핵심 동력으로는 반도체 산업의 유례없는 호황에 따른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와 외환시장의 수급 여건 개선이 지목된다.

국제결제은행(BIS)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9월 원화의 실질실효환율(REER, 2020년=100 기준)은 전월 대비 3.2% 증가한 92.73을 기록했다. 이는 2024년 11월(93.43) 이후 22개월 만에 도달한 가장 높은 수치다. 실질실효환율은 주요 교역국과의 환율 및 물가 차이를 반영하여 산출되는 지표로, 지수가 높을수록 상대국 통화 대비 자국 통화의 실질적인 구매력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반면 지수가 100 미만일 경우에는 기준 연도인 2020년보다 실질 가치가 낮음을 뜻한다.

세계 63위에서 60위로, 기록적인 상승세

원화 가치는 지난 6월 금융위기 직후의 수준까지 급락한 바 있다. 당시 BIS가 집계한 6월 원화 실질실효환율은 83.03으로, 2009년 3월(79.33) 이후 17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은 조사 대상 64개 경제권 중 일본(65.48)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63위를 기록하며 약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원화는 7월 85.44, 8월 89.88, 9월 92.73으로 매달 가파르게 치솟았다. 월별 상승률은 7월 2.9%, 8월 5.2%, 9월 3.2%를 기록했는데, 7월에 상승률 2위를 차지했던 원화는 8월과 9월 연속으로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이에 따라 실질실효환율 지수 순위도 6월 63위에서 9월 60위로 올라섰다.

이처럼 두 달 연속으로 세계 최고 상승률을 기록한 것은 1994년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이래 최초의 사건이다. 과거 한국이 월간 상승률 1위를 기록했던 사례는 1998년 7월(8.40%)과 12월(5.85%), 2012년 11월(1.94%), 2017년 11월(1.99%) 등 총 네 차례뿐이었으며, 그중 두 차례는 단 한 달 동안만 유지되었다. 이번처럼 두 달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나타낸 것은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반도체 호황이 이끈 경상수지 흑자 확대

강력한 원화 강세의 배경에는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맞물린 반도체 수출 호황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2,792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기록한 696억 7,000만 달러보다 4배가량 늘어났다. 지난 6월에는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인 497억 3,000만 달러의 흑자를 달성했으며, 이어 7월 420억 8,000만 달러, 8월 461억 1,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한국은행은 올해 연간 경상수지가 지난해 기록한 사상 최대치인 1,231억 달러의 약 3.7배에 달하는 4,50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경제 지표의 개선은 원·달러 환율의 급격한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지난 6월 달러당 1,528.0원이었던 월평균 환율은 7월 1,488.9원, 8월 1,404.4원, 9월 1,358.8원으로 빠르게 낮아졌다. 특히 지난 23일에는 달러당 1,324.6원까지 떨어지며 최근 2년 사이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