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근육 소실의 주범, '악액질'의 실체
암 환자의 체중과 근육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암 악액질' 현상이 근육 조직보다 지방 조직의 붕괴에서 시작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는 근육이 본격적으로 위축되기 전인 '전악액질' 단계가 치료를 위한 결정적 골든타임임을 시사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공략하기 위해 한약재 추출물과 홍삼 복합물을 활용한 악액질 방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준홍 전북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는 지난 26일부터 29일까지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열린 '제14회 국제인삼심포지엄'에 참석해 암 악액질의 발생 기전과 천연물을 이용한 치료 전략을 공개했다. 악액질은 단순한 체중 감소를 넘어 골격근이 점차 줄어드는 복합 대사 증후군으로, 영양 공급을 늘려도 회복되지 않는 전신적 영양 부족 상태를 의미한다. 암이 가장 대표적인 원인이지만 노화나 만성질환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악액질은 진행 단계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체중이 5% 미만으로 줄며 대사 변화가 시작되는 '전악액질', 체중 감소 폭이 5%를 초과하며 근육 위축이 동반되는 '악액질', 그리고 치료가 어려운 말기 '불응성 악액질'이 그것이다. 진단 시에는 일정 기간 5% 이상의 체중 변화, 식욕 부진, 피로감, 그리고 C반응성단백(CRP) 등 염증 지표의 상승 여부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지방 조직 붕괴가 근육 소실의 전조 증상
최신 항암제와 면역관문억제제의 등장으로 암 생존율은 향상되었으나, 악액질은 여전히 환자 사망을 부르는 주요 원인으로 남아 있다. 연구팀은 악액질을 제어함으로써 항암 치료의 효율을 높이고 환자의 생존 기간과 삶의 질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시행되는 영양 지원 중심의 1차 치료는 그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악액질은 신체 여러 장기가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이다. 암세포는 뇌 신경에 영향을 주어 식욕을 떨어뜨리고, 지방 조직에서는 에너지가 열로 소모되는 갈색지방화와 지방 분해 현상이 나타나 혈중 유리지방산과 글리세롤 수치를 높인다. 근육에서는 아트로진-1(Atrogin-1) 같은 단백질 분해 유전자가 단백질을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간에서는 에너지 낭비성 대사가 일어난다.
박 교수 연구팀은 전악액질 단계에서 근육 소실보다 지방 조직의 기능 이상이 선행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대장암 세포(CT26)를 7일간 배양한 환경을 재현해 지방전구세포(3T3-L1)에 처리한 결과, 지방세포의 분화가 억제되고 이를 조절하는 핵심 유전자(PPARγ, C/EBPα, aP2)의 발현이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후보 물질인 'PA' 추출물은 지방세포의 축적을 회복시키고 유전자 발현을 정상화하는 효과를 보였다.
홍삼 복합물과 천연물 기반의 새로운 치료 전략
근육 소실 억제 측면에서도 유의미한 성과가 확인되었다. 박 교수팀은 생물정보학적 분석을 통해 근위축 관련 유전자 1683개와 PA 성분의 표적 유전자 101개 사이의 공통 분모인 24개 유전자를 찾아냈다. PA 성분은 근육 단백질 합성을 촉진하는 PI3K 신호 경로를 활성화하고 하위 인자인 4EBP1의 인산화를 유도했다. 실제로 암을 이식한 쥐에게 PA를 투여하자 종양 무게를 제외한 체중과 다리 근육(전경골근) 무게가 증가했으며, 미토콘드리아 생성 유전자(NRF1)의 발현도 늘어났다.
연구는 홍삼과 다른 한약재를 혼합한 복합 처방으로 확장되고 있다. 크레아틴키나아제(CK) 지표를 활용한 새로운 선별법으로 185종의 추출물을 분석해 4종의 후보를 도출했으며, 이 중 홍삼과 시너지를 내는 조합이 근육세포의 생존과 미토콘드리아 생성을 돕는 것을 확인했다. 악액질 쥐에 홍삼 복합물을 투여한 결과 체중 감소가 억제되었고, 제지방량 변화와 함께 악력 지표가 유의하게 상승했다.
또한 AI 기반 표현형 분석 플랫폼과 공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신약 재창출 연구를 통해 약 3000종의 단일 화합물 중 26종의 후보를 선별해냈다. 박 교수는 홍삼 복합물과 단일 화합물 후보들의 효능이 확인된 만큼, 향후 악액질 치료제나 건강기능식품 개발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