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의 대중 규제에도 계속되는 빅파마의 중국행
미국 정부가 중국을 향한 견제 수위를 높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신약 후보물질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미국 대형 제약사(빅파마)들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있다. 주요 제품들의 특허권이 만료되는 '특허 절벽' 상황에서, 방대한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중국이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 바이오 업계에서도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역할론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지난 22일(현지시간) 중국 등에 대한 자본 투자를 제한하는 내용의 규칙 제정 예고안을 내놓고 의견 수렴 절차를 시작했다. 이번 규제안의 핵심은 일반적인 기술 도입 계약을 제외한 지분 인수, 전환 가능한 부채 금융 제공, 신규 투자 및 합작 투자 설립 등을 통제하는 것이다. 특히 바이오 분야에서는 약물 전달 기술과 의약 물질 관련 기술이 제한 대상에 포함되어,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통해 해당 산업을 육성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억제되지 않는 빅파마의 대규모 중국 기술 도입
정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움직임은 규제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미 재무부의 발표가 나온 당일, 미국의 길리어드는 중국 펩스타로부터 경구용 염증성 질환 치료제 후보물질을 포함한 개발 프로그램을 인수한다는 계약을 공표했다. 해당 물질은 현재 임상 1상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거래 종료 시 지급될 규모가 12억 7500만 달러에 달한다. 화이자 역시 지난 5월 미 의회의 규제 압박이 거세던 시기에 중국 이노벤트와 항암 신약 관련 12개 프로그램을 협력하기로 했다. 이 계약의 선급금은 6억 5000만 달러이며, 단계별로 지급될 기술료는 최대 98억 5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러한 공격적 투자는 2030년까지 몰려오는 주요 신약들의 특허 만료 시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화이자는 올해 2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독점권 만료로 인한 매출 타격이 올해 11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며, 2026년부터 2030년 사이에는 이러한 매출 감소세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독보적인 신약 개발 인프라와 한국의 기회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주요 신약 개발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국가 중 하나다. 미국 전문 매체 피어스바이오텍의 자료에 따르면, 항체-약물 접합체(ADC) 임상시험의 51%와 키메라 항원 수용체(CAR) 관련 임상시험의 48%가 중국에서 개발된 후보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밸류에이트의 자산 포트폴리오 전략 책임자인 마크 랜스델은 피어스바이오텍과의 인터뷰에서,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중국을 타깃팅하지 않더라도 검토하는 후보물질의 상당수가 중국 기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만약 미국의 대중 규제가 초안대로 확정된다면,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한 미 빅파마들의 지분 투자나 합작 투자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제약 업계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으나, 미·중 간의 바이오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규제 대상에서 바이오를 제외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 바이오 업계는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원천 기술을 갈망하는 미국과 해외 진출 통로가 필요한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원장은 빅파마들이 대기업보다는 혁신적인 원천 기술을 원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기술 수출 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과 일본이 유력한 대안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중국이 해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한국을 활용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다만,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역량 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국가 전체의 바이오 투자 규모는 커졌으나 민간 투자가 활발히 유입될 수 있는 분야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짚었다. 그는 다가오는 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신약 개발 데이터가 확보되어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불안정한 펀드 환경을 선제적으로 안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