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대기업의 재고 비축이 중소기업 숨통 조여
반도체와 석유화학, 금속가공 등 국가 산업의 핵심 동력인 액체질소와 산소 등 산업용 가스의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정적 배경은 반도체 제조사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안전재고를 독점적으로 비축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경인고압가스공업협동조합이 지난 10월 7일부터 이틀간 조합 회원사 37곳을 대상으로 긴급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가스 공급사들이 물량 출하를 제한하거나 쿼터를 줄이는 주된 이유로 '대기업 라인 우선 공급'과 '안전재고 비축 요구'가 86.1%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플랜트의 정기보수 일정(38.9%)과 설비 결함(30.6%), 일방적인 쿼터 감축(19.4%) 등이 원인으로 조사됐다.
최근 가동률이 높아진 반도체 대기업들이 약 72시간 분량의 안전재고를 선점하면서, 전체 물량의 10%도 채 쓰지 못하는 중소 충전업체와 하청 제조사들의 공급망은 사실상 단절된 상태다. 액화질소는 회로 산화 방지를 위한 퍼지 공정이나 석유화학 배관의 가스 제거, 금속 레이저 절단 및 식품 냉동에 쓰이는 필수 소재다. 액체산소 역시 제철소 용광로 제련, 이차전지 양극재 열처리, 의료용 등 폭넓은 분야에 활용된다.
입고량 반토막에 공장 멈춰... 조달 비용은 폭증
공급사의 소통 방식도 문제로 드러났다. 공급사들은 업체가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박하게 상황을 통보(69.4%)했으며, 공식 문서가 아닌 모바일 메신저나 유선상의 구두 전달(69.4%)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중소 업체들이 겪는 물량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다. 조사에 참여한 기업 중 36.1%는 입고량이 41% 이상 급감했다고 밝혔으며, 30.6%는 31~40%의 감소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10월 현재의 상황도 낙관적이지 않다. 응답자의 83%가 8~9월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부족이 지속(47.2%)'되거나 '상황이 악화(36.1%)'되었다고 전했다. 특히 55.6%는 생산 중단이 우려되는 극한의 위기 상황임을 호소했다. 이러한 원료 공급 차질은 결국 중소 제조 공장의 가동 중단(55.6%)으로 이어졌다. 금속레이저 가공 및 특수필름 제조 라인이 며칠씩 멈춰 섰으며, 한 업체는 이틀간의 라인 정지로 인해 납기 지연 배상금과 자재 불량 비용 등 약 2,000만 원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중소 유통사들은 여수나 울산 등 먼 거리에서 가스를 조달(상차 경험 94.4%)하며 버티고 있으나, 이로 인해 운송 비용 부담(97.2%)이 커지고 조달 단가가 평소보다 2~5배 이상 뛰었다. 이 과정에서 운전기사의 피로도(80.6%) 역시 한계치에 도달했다.
상생을 위한 대기업의 '고통 분담' 절실
업계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글로벌 메이커사의 중소기업 소외 정책(38.9%), 수요와 공급의 총량 불균형(30.6%), 대·중소기업 간 수급 쏠림(27.8%) 등을 지목했다. 현장에서 정부와 대기업에 요구하는 가장 시급한 대책은 '대기업 수요처의 일시적인 안전재고 비축 완화(83.3%)'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형 수요처가 현재 72시간 수준인 안전재고 비축량을 10~20%만 줄여 시장에 풀어준다면 중소기업의 가동률을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고압가스연합회 이영식 전무는 질소 가스가 대한민국 제조업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기초 소재임을 강조하며, 대기업의 재고 독점이 지속될 경우 내년 초 수급 상황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이 전무는 산업 생태계의 공멸을 막기 위해 대기업이 상생 차원에서 안전재고 비축을 조절하고, 가스 사용을 절약하여 중소 제조업체에 물량이 돌아갈 수 있도록 통 큰 고통 분담에 나서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