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시작되는 판각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로 지정된 '해인사 대장경판', 즉 팔만대장경을 재현하기 위한 작업이 800년 만에 본격적인 막을 올렸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방대한 경전을 눈 깜짝할 사이에 복제해내는 현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8만 장이 넘는 경판을 사람의 손길로 일일이 새기는 데는 향후 최대 한 세기가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조각도가 경판 위를 지나갈 때마다 글자들은 한 획씩 선명한 형체를 드러냅니다. 스님들과 교육생들은 글자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세 번씩 절을 올리며 경건한 마음을 다스립니다. 이는 800년 전 고려 시대 장인들이 보여주었던 지극한 정성을 현대에 다시금 계승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전통 기술 전수와 인류를 향한 염원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의 경판 한 장 두께는 4cm에 달하며, 총 8만 1,352장의 경판을 모두 쌓아 올리면 그 높이가 백두산보다도 높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국가무형유산인 각자장을 포함한 10여 명의 전문가가 3년 전부터 스님 등 670여 명을 대상으로 전통 판각 기법을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김각한 각자장은 과거보다 현재의 공구나 기술적 조건이 더 나을 수 있지만, 속도보다는 완벽함을 추구하며 천천히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단순한 경판의 복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수행 정신을 이어가는 데 있습니다. 고려인들이 나라의 안녕을 빌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작업은 인류의 평화와 생명 존중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혜일 해인사 주지는 AI를 활용하면 빠르고 아름답게 만들 수는 있겠으나, 인류의 미래와 지구를 향한 간절한 바람까지 담아낼 수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대장경 타운 조성과 지속 가능한 미래

해인사 인근에는 경판 제작의 핵심 재료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심는 작업이 진행되며, 판각 교육과 경판 제작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대장경 타운'도 함께 조성될 계획입니다. 한 글자마다 새로운 시대의 소망을 새겨 넣는 이번 대장정은 앞으로 최대 100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