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사고력을 동시에 상실한 이주배경 아동들

경기 안산시 선부동에 위치한 이주민시민연대 사무실 내 도서관에서, 29일 이주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외국어로 된 그림책을 살펴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안산의 중학교에 재학 중인 말리카(가명·13)는 글자를 읽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러시아에서 온 말리카는 부모의 취업을 따라 3살 무렵 한국에 정착했다. 가정 내에서는 러시아어로 대화하지만, 부모가 생업으로 바쁜 사이 한글과 러시아어 문자를 모두 익힐 기회를 놓쳤다. 평생 그림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말리카는 문자를 통해 사고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는 내내 잠을 자야 했으며, 현재 중학교 1학년이 된 그녀는 러시아어와 한국어 모두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른바 ‘무국어’ 상태로 자라나고 있다.

경제적 부담과 도서 부족이 가로막은 문해력 성장

말리카처럼 부모를 따라 입국한 이주 배경 아동들은 독서 활동조차 원활히 수행하기 어렵다. 부모의 일자리 이동으로 인해 급격한 언어 환경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모국어 도서마저 읽지 못하게 되면, 근본적인 문해력 형성 기회 자체가 박탈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쓰인 책을 구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최혁수 이주민시민연대 대외전략실장은 러시아어 도서 등이 국내에서 판매될 경우 한국 도서보다 몇 배나 비싼 가격에 형성되어 있어 경제적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관리 대상'으로만 취급되는 다문화 아동의 현실

도서 대출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다. 몽골 출신으로 안산에서 두 딸을 키우는 수브드(38)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어도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빌리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실제 한겨레가 안산시 원곡동과 선부동 일대의 공공도서관을 조사한 결과, 아이들을 위한 원서 비치율은 매우 낮았다. 한 이주민 밀집 지역의 사서는 정부 지원 다문화 도서들이 주로 사회통합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치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이들이 연령에 맞게 누려야 할 재미와 의미를 고려하기보다, 이들을 단순한 ‘관리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는 비판이다.

고립된 지역과 제도적 지원의 사각지대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안성시 대덕면 내리는 과거 중앙대 다빈치캠퍼스 학생들이 떠난 자리에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외국인들이 모여들면서 일종의 ‘섬’처럼 고립되었다. 이 지역의 유일한 초등학교는 전교생 200여 명 중 90% 이상이 외국인 학생일 정도다. 하지만 원룸촌 중심의 주거 환경 탓에 아이들이 책을 읽을 만한 공간은 거의 없으며, 저임금으로 인해 3~5명이 한 원룸에 거주하는 가정도 많아 책을 구매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주 배경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에만 주목해 왔으나, 정작 언어 능력을 키워야 할 시기에 아이들이 글 자체를 잃어버리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김달성 목사는 이들이 사회 적응을 위한 기초적인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며, 취약계층에 대한 세심한 지원책 마련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