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와 데이터의 시대에서 ‘토큰 경제’로
과거 음성 통화를 분 단위로 판매하거나 데이터를 할당해 제공하던 통신사들이 이제는 인공지능(AI) 이용량을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AI가 검색부터 예약, 복잡한 업무 처리까지 수행하며 수요가 폭증하자, 이를 새로운 수익 모델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기업용 AI를 연결하고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청구하는 이른바 ‘토큰 경제’가 통신 산업의 차세대 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AI가 질문을 해석하고 답변을 도출할 때 사용하는 데이터의 기초 단위이자 비용 산정의 척도인 ‘토큰’이 핵심이다. 통신사들은 단순히 데이터센터나 클라우드, GPU(그래픽처리장치)를 대여하는 수준을 넘어, 기업 맞춤형 AI를 공급하고 이용료까지 통합 관리하는 비즈니스를 꿈꾼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 산하 GSMA인텔리전스는 통화 시간과 스마트폰 데이터에 이어 토큰이 새로운 소비 단위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
국내 통신 3사의 차별화된 AI 전략
SK텔레콤은 지난 8일 ‘토큰 게이트웨이’ 사업을 향한 청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개인과 기업의 AI 활용 패턴을 정밀하게 분석해 최적의 모델과 연산 인프라를 매칭해주는 관제센터 역할을 수행한다. 엔비디아와 협력 중인 ‘AI 팩토리’를 통해 연산 기반을 다지고, 기존 통신 사업에서 검증된 본인인증, 결제, 과금 기술력을 AI 이용 관리 서비스에 이식한다는 전략이다.
KT 역시 토큰의 생성부터 중개, 과금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는 ‘토큰 팩토리’를 신규 사업으로 내세웠다. 질문의 의도나 난이도를 파악해 가장 적절한 AI 모델을 선별하고, 성능과 비용 효율성을 고려해 요청을 배분하는 기술이 핵심 동력이다. KT는 연내 출시 예정인 ‘모두의 AI’ 서비스에도 이 기술을 적용할 방침이다.
LG유플러스는 토큰 요금제와 관련된 서비스 개발 및 출시를 검토하고 있으며, AI 서비스 비용을 낮추기 위한 기술 연구에도 매진하고 있다. 특히 이달 AI 모델 최적화 기업인 옵트에이아이와 진행한 초기 공동 연구를 통해, 동일한 GPU 자원으로 처리할 수 있는 토큰의 양을 기존 대비 최대 4배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밝혔다.
글로벌 시장 선점과 수익성 확보의 과제
해외에서는 이미 AI 이용량을 패키징한 요금제가 등장했다. 싱가포르의 싱텔은 지난 1일 기업 대상 ‘토큰 서비스(TaaS)’를 선보였다. 구독 형태로 토큰을 확보하면 여러 기업의 AI 모델을 통합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콘텐츠 제작 등 업무 성격에 맞춰 모델을 자동 연결하고 비용과 성능을 조절하며, 데이터 보안을 위해 싱가포르 내 인프라에서 작동하는 모델도 함께 제공한다.
중국 시장의 변화도 빠르다. 차이나텔레콤은 지난 5월, 월 9.9위안(약 1,970원)에 1,000만 토큰을 제공하는 개인용 상품과 코딩 및 AI 에이전트 운영을 위한 기업용 상품을 출시했다. 마치 휴대폰 데이터를 선택해 가입하듯 AI 이용량을 구매하는 방식이다. 차이나모바일 또한 일부 지역에서 클라우드 PC와 AI 에이전트, 토큰을 결합한 상품을 선보였다.
다만 단순한 토큰 재판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동일한 AI 모델을 두고 사업자 간 가격 경쟁이 심화될 경우, 모델 이용료를 제외한 순이익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GSMA인텔리전스는 업무 특성에 맞춰 비용, 품질, 응답 속도를 최적화한 모델을 골라주는 고도화된 서비스에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AI 관리 플랫폼 시장을 선점한 클라우드 및 AI 전문 기업들과의 경쟁도 통신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