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공정 기술 결합한 하이브리드 본딩 전쟁

인공지능(AI) 반도체용 칩의 연결 밀도를 극대화하는 '하이브리드 본딩' 장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장비 거물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네덜란드 베시(Besi)의 지분을 대폭 늘리며 공세를 펼치는 가운데, ASML과 한국의 주요 장비사들도 차세대 접합 기술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업계의 소식에 따르면 어플라이드는 지난 26일(현지시간) 베시의 지분율을 기존 9%에서 약 2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주식 매입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지난해 4월 실시했던 첫 투자 이후 1년 6개월 만에 이루어진 추가 확대 조치다. 다만 실제 주식의 인도는 향후 미국 반독점 심사 절차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완료될 예정이다.

세계 5대 반도체 장비사 중 하나인 어플라이드는 그동안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분야의 증착 및 표면 처리 장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반면 베시는 완성된 칩을 정밀하게 결합하는 후공정 장비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양사는 2020년부터 협업을 이어오며 지난해 10월, 두 회사의 강점을 결합한 통합 하이브리드 본딩 시스템인 '키넥스(Kinex)'를 세상에 선보였다. 키넥스는 칩 표면 세정과 정렬, 그리고 접합 상태 검사까지의 과정을 단일 시스템 내에서 처리함으로써, 여러 단계를 거칠 때 발생하는 오염이나 정렬 오차를 최소화하고 생산 수율을 끌어올리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양사는 이달 1일, 협력 범위를 3차원 패키징 시장까지 넓히며 차세대 반도체 연결 기술 공략을 가속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HBM 고단화의 핵심,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적층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되는 HBM 공정은 D램 내부의 실리콘관통전극(TSV)을 통해 수직 통로를 만들고, 칩 사이에는 미세한 금속 돌기인 '범프'를 배치해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는 열과 압력을 이용하는 열압착(TC) 본더가 투입된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본딩은 범프를 사용하는 대신 칩 표면에 있는 구리(Cu) 배선과 절연막을 직접 맞붙이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칩 사이의 간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기존 8단이나 12단을 넘어 16단 혹은 20단 이상의 초고단 HBM을 구현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 측면에서도 탁월한 이점을 제공하지만, 그만큼 극도로 정밀한 접합 기술력이 요구된다.

ASML의 시장 진입설과 국내 기업의 추격

노광 장비 분야 세계 1위인 네덜란드 ASML의 시장 진입 가능성도 구체화되고 있다. 반도체 분석 전문 기관인 세미애널리시스는 지난 15일, ASML이 2022년 말부터 2024년 11월까지 출원한 27개의 본딩 관련 특허군을 분석한 결과 장비 개발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지난 3월에는 ASML이 EUV 노광장비의 핵심 구동장치를 공급하는 프로드라이브 테크놀로지스, VDL ETG 등과 함께 하이브리드 본더의 구조 설계에 착수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다만 ASML 측은 현재 하이브리드 본더의 구체적인 개발 여부나 공식 출시 일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국내 장비 업계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한화세미텍은 지난 2월 2세대 하이브리드 본더인 'SHB2 나노' 개발을 마쳤으며, 올해 상반기부터 고객사 대상의 성능 평가를 진행 중이다. 한미반도체 역시 연내에 2세대 하이브리드 본더의 시제품을 공개할 예정이다. 한미반도체는 내년 상반기 인천 주안국가산업단지에 구축 중인 하이브리드 본더 전용 공장인 7공장을 가동할 계획이다. 특히 한미반도체는 기존 HBM용 TC 본더를 넘어 인텔의 EMIB나 TSMC의 CoWoS와 같은 첨단 패키징 시장을 겨냥한 'FC 본더 75'를 글로벌 고객사에 출하하며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미국의 테라팹과도 공급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장비 자회사인 세메스 또한 차세대 공정 대응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세메스는 지난 7월 '나노코리아 2026'을 통해 플라즈마 표면 처리부터 세정, 접합, 검사까지 일괄 수행하는 통합 시스템의 개발 현황을 공개했다. 도현호 세메스 연구소장은 고객사와의 공동 개발을 언급하며, HBM5 단계에 접어들면 하이브리드 본딩 툴이 본격적으로 도입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