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 사고 급증에도 무력한 피해 회복 시스템

가상자산거래소인 빗썸이 지난 28일 사내 모바일 시스템을 노린 외부 해킹 공격을 받아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공표했다. 최근 이처럼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빈번해지며 소비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으나, 정작 피해를 보상받는 과정은 매우 험난한 실정이다. 피해 구제를 뒷받침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탓에 기업들은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분쟁조정과 소송을 방해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들은 입증을 위한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기업의 '버티기' 전략에 지쳐가는 상황이다.

거부당한 조정안과 지연되는 소송의 실태

참여연대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결성한 ‘소비자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 제정연대’가 29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300만 명의 정보가 유출됐던 SK텔레콤 사태에서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의 1인당 30만 원 지급 조정안은 기업 측의 일방적인 거부로 인해 무용지물이 됐다. 결국 변호사 비용을 직접 부담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이들은 당초 분쟁조정을 신청했던 3267명 중 15%인 485명에 그쳤다. 또한 3755만 개의 개인정보 계정이 유출된 쿠팡 사건의 경우, 기업이 수사나 행정처분을 근거로 재판 중단을 요청하거나 원고들의 인적사항 소명 및 위임 여부를 요구하며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다.

기업에 유리한 불공정한 입증 책임 구조

이러한 불합리함의 근본 원인은 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된 현행 피해 구제 절차에 존재한다. 분쟁조정위원회의 의결만으로도 처리 기간을 늘릴 수 있어 기간 연장이 상시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기업의 자료 제출 기한에 제한이 없어 지연 전술을 막을 수단도 없다. 특히 핵심 증거는 기업 내부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입증 책임은 피해자가 짊어지고 있어, 기업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옵트아웃'과 '디스커버리' 도입을 통한 제도 정비

불공정한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제도 개편이 시급하다.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소송 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판결의 효력이 전체 피해자에게 미치는 ‘옵트아웃’ 방식의 집단소송제 도입이 필요하다. 소송 참여자에게만 구제권을 부여하는 현행 ‘옵트인’ 방식은 기업의 지연 전술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재판 전 당사자 간 증거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통해 피해자들이 원활하게 증거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안 투자 유인을 위한 강력한 법적 장치 마련

지난달 말 시중은행을 포함한 16개 금융사의 해킹으로 수만 건의 정보가 유출된 데 이어, 최근에는 자산운용사, 증권사, 가상자산거래소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AI 기술의 진화로 해킹 수법이 정교해지면서 시민들의 정보 보호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만약 기업이 재판 지연과 가벼운 처벌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기업도 보안 강화나 정보 보호를 위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회와 정부, 사법부는 실효성 있는 구제 절차를 위해 관련 법과 제도를 신속히 정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