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잣대로 재단되는 대중문화

대중문화가 정치적 진영 논리에 휘말리며 이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나 정치권 등 특정 진영에서 특정 작품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반대 진영에서는 그 작품의 진위나 가치를 따지기보다 무조건적인 옹호를 이어가는 양상이 반복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발생한 여러 사례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영화 '암살자(들)'를 비롯해 SBS 드라마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 그리고 미국 개발사가 제작한 가상 한반도 전쟁 배경의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가 그 중심에 서 있다.

정치권과 청원의 압박, 드라마 '닥터X'

드라마 '닥터X'의 경우,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신군부의 헬기 사격 의혹과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메디컬 서사와 결합한 연출이 쟁점이 되었다. 이를 문제 삼는 측에서는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을 통해 제작진의 출석과 방영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정치권 또한 해당 묘사가 특정 정치 세력을 겨냥한 도구라며 공세를 펼치는 중이다.

물론 대중문화 콘텐츠의 완성도나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내놓는 것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다. 다양한 시각이 교류되고 건강한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문화 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배우를 향한 사상 검증과 인신공격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양상은 정상적인 비평의 범위를 넘어선 듯 보인다.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은 자유롭지만, 출연 배우와 창작물을 동일시하여 평가를 내리는 방식은 위험하다. 특히 대본에 따라 연기했을 뿐인 배우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사상 검증이나 인신공격은 반드시 자제되어야 한다.

실제로 영화 '암살자(들)'에 출연한 배우 유해진은 신변 위협을 느껴 경찰에 보호 요청을 하기도 했으며, '닥터X'의 주연 김지원은 악성 댓글과 AI로 가공된 규탄 이미지, 광고 불매 압박 등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조차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소환된 실정이다.

정치 논리에 종속되는 문화 생태계

콘텐츠를 순수하게 즐기는 대신 진영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화하는 행태는 결국 문화예술 영역을 정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온라인상의 극단적 여론과 정치권의 프레임이 문화 생태계를 위협하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시장과 시청자는 창작물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