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유산과 AI 로봇의 만남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1964년에 창조한 'K-456' 로봇이 인공지능(AI) 기술과 한자리에서 마주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백남준의 예술적 궤적을 조명하는 동시에, 몰입형 확장현실(XR) 연극처럼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첨단 기술 기반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26일 ACC의 발표에 따르면, 예술과 최신 기술의 융합을 주제로 한 'ACT 페스티벌 2026'이 지난 23일 ACC 복합전시 3·4관 등에서 막을 올렸다. '아이, 휴먼: 테크네세(世)에 응답하기'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이번 축제는 다음 달 8일까지 관객을 맞이한다. 급격한 AI 발전과 기술 혁신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는 현시점에서,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탐구하는 것이 이번 행사의 핵심 취지다.
10개국 29개팀이 펼치는 기술 예술의 향연
이번 축제는 전 세계 10개국에서 모인 29개 팀이 참여하며, 미디어아트의 개척자인 백남준의 작품으로 그 시작을 알린다. 약 60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등장한 '로봇 K-456'은 AI 기술이 적용된 실리콘 로봇과 대치하며 특별한 장면을 연출한다. 관객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는 이 피지컬 AI 로봇의 명칭은 '네르바 아티피시아'다.
두 로봇이 조우하는 무대 너머로는 1982년 미국 뉴욕에서 백남준의 '로봇 K-456'이 선보였던 행위예술 영상이 상영된다. 당시 자동차에 치이는 퍼포먼스를 통해 '21세기 최초의 참사'라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 로봇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재생하거나 콩을 배설하는 등 파격적인 예술적 행위를 보여준 바 있다.
XR과 VR로 경험하는 초현실적 몰입
올해 축제의 핵심 콘텐츠로 꼽히는 것은 연극과 가상현실(VR)을 결합한 몰입형 확장현실(XR) 작품 '블러(BLUR)'다. 관객이 헤드셋을 착용하는 순간, 배우의 연기와 VR, 증강현실(AR), AI가 뒤섞인 초현실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배우의 안내를 따라 작품 속으로 들어간 관객은 기술이 빚어낸 경이로우면서도 섬뜩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가상 공간을 유영하는 관객은 배우의 실제 손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다 땅 밑으로 추락하는 등의 상황을 실제처럼 체감한다. 생명복제 기술을 다루는 '블러'는 기술 만능 시대에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확장현실이 구현하는 극한의 상상력과 공포를 신비롭고 괴기스럽게 전달한다. 크레이그 킨테로와 피비 그린버그가 제작한 이 작품은 이미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한, 캐나다의 발리 푸굴랭 감독이 연출한 VR 다큐멘터리 '트레이스: 애도의 프로세서, 광주에서'도 축제 기간 중 관객을 만난다. 감독이 광주에 머물며 5·18민주화운동과 무등산, 그리고 광주의 역사적 궤적을 조사해 완성한 이 작품은, 관객이 가상의 숲과 언덕을 거닐며 상실과 슬픔의 기억을 되짚게 한다.
김상욱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은 뉴욕 거리를 누볐던 백남준의 초기 로봇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루는 XR 연극까지 아우르는 이번 페스티벌의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는 피지컬 AI를 활용한 한국 작가들의 신작과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작품들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로 운영되며, XR 체험을 원하는 관객은 ACC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에 예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