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제조 경쟁력 뒤에 숨겨진 소재 기술의 공백
대한민국이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칩의 결합과 보호를 담당하는 첨단 패키징 소재 분야에서는 일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국내 일부 소재 업체들이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이를 실제 반도체 제조 공정에 적용할 수 있는지 입증할 데이터와 검증 설비가 부족해 국산화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윤창민 인하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는 지난 29일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한국공업화학회 2026년도 추계학술대회 프레스데이'에 참석해 현 상황을 진단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패키징 및 소재 개발 실무를 수행했던 윤 교수는 현재의 HBM 시장을 두고 "한국은 제조 분야에서는 앞서가고 있지만, 소재 측면에서는 보유한 것이 거의 없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꼬집었다.
일본의 소재 장악력과 기술적 난제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한 HBM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이다. 칩을 높게 쌓을수록 전기적 연결성, 방열 성능, 구조적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패키징 기술이 성패를 가른다. 윤 교수는 국산화가 유독 어려운 사례로 일본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언더필(Underfill)' 소재를 언급했다. 언더필은 칩 사이의 빈틈을 메워 접합부를 보호하고 구조적 안정을 돕는 필수 소재다.
일본 기업들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는 비결은 다양한 소재 특성을 정밀하게 조합하는 고도의 기술력에 있다. HBM 내부에는 열팽창 계수가 다른 여러 소재가 혼재되어 있어, 작동 시 발생하는 열로 인해 패키지가 휘거나 뒤틀리는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형을 억제하면서도 절연과 방열 기능을 모두 충족해야 하기에 소재 개발과 검증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윤 교수는 차세대 HBM으로 갈수록 방열 소재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기존 실리카 충전재를 넘어 열전도성이 우수한 알루미나 충전재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기술 흐름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검증 데이터 부족이 불러온 국산화의 한계
국내 소재 산업의 치명적인 약점으로는 실제 제조 공정에서의 성능 검증 역량 부재가 꼽혔다. 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은 단순히 소재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실제 패키징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자체 테스트베드와 시험 설비를 완비하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고객사가 요구하는 실제 공정 적용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기술력을 증명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첨단 반도체 소재의 신뢰성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드는 고가 장비와 시험 시설이 필수적이다. 일본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경험을 바탕으로 평가 체계를 구축해 놓았으나, 국내 중소 소재 기업들은 개발한 제품을 실제 반도체 제조 환경과 유사한 조건에서 시험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윤 교수는 이러한 평가 설비와 공정 시설의 유무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결정적인 격차라고 강조했다.
한편, 미국의 첨단 장비 수출 규제에 대응해 패키징 기술에 집중 투자해 온 중국의 성장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 교수는 중국이 기존 패키징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기술력과 점유율을 확보했다고 설명하면서도, HBM과 같은 고도화된 패키징 분야는 아직 중국에게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