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 불안에 안전자산으로 쏠리는 자금

국내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위험 자산 대신 안전한 예금과 외화, 실물 자산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직장인 김태진 씨는 다음 달 만기가 예정된 정기예금뿐만 아니라 현재 운용 중인 주식 예탁금까지 모두 은행 예금으로 옮길 계획이다. 반도체 관련 주식을 추가 매수할지 고민도 했으나, 증시가 뚜렷한 반등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 4%대 금리를 제공하는 은행 예금의 매력이 더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자산 증식을 위해 당분간 주식보다는 예금 같은 안전 자산의 비중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증권사에서 은행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머니 무브' 현상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주가 하락세가 이어지자 주식에 머물던 자금이 은행권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으로 유입된 자금은 기준금리 인상 효과를 누리며 연 4%대 정기예금에 예치되거나, 가치가 낮아진 달러와 엔화 같은 외화예금, 혹은 실물 자산인 금으로 분산되고 있다. 특히 상반기 주식 급등기에 높은 수익을 경험했던 투자자들은 원금은 보장하면서도 예금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나 지수연동예금(ELD)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외화예금·골드바 '저점 매수' 수요 급증

금융권 데이터에 따르면 5대 주요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개인 달러 예금 잔액은 15일 기준 142억 3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2021년 12월 말(146억 5000만 달러) 이후 약 4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며, 지난 9월 말(141억 달러)과 비교해도 늘어난 수치다. 은행들은 미국 주식 투자 감소와 환율 하락 등이 맞물리며 개인들의 달러 예금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엔화 예금 역시 15일 기준 2656억 2000만 엔을 기록하며 9월 말(2540억 2000만 엔)보다 116억 엔 증가했고, 이는 2024년 11월 말(2715억 엔) 이후 최대치다.

실물 금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15일까지 집계된 5대 은행의 골드바 판매액은 430억 3000만 원으로, 이는 9월 한 달 판매량인 290억 8000만 원의 1.5배에 달하는 규모다. 공급 부족으로 인해 일부 은행에서 판매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7월 이후 다시 재개되었다. 은행 측은 국제 금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과 자산 분산 수요가 결합하면서 고객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달러, 엔화, 금 등 주요 자산의 가치가 고점 대비 낮아졌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저점 매수' 전략으로 풀이된다. 원·달러 환율은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장중 1322.7원을 기록하며 5거래일 연속 연저점을 찍었고, 원·엔 환율도 지난 12일 839.9원까지 떨어지며 2008년 1월 이후 최저 수준을 보였다. 금값 또한 올해 1월 29일 기록한 고점(26만 9810원) 대비 약 30% 하락하며 매력적인 가격대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금 보장형 상품과 '빚투'의 경계

시중은행들은 고객 유치를 위해 연 4%대 금리를 앞세우고 있다. BNK경남은행은 4.10%, BNK부산·제주·SC제일은행은 4.05%의 예금을 제공하며, 신한은행과 농협은행은 각각 4%와 3.9%의 특판 금리를 운영 중이다. 우리은행은 3개월 단기 특판으로 3.4% 금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5대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19일 기준 1018조 1683억 원을 기록하며, 8월 말 1000조 원 돌파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더 높은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들은 ELB와 ELD 같은 원금 보장형 상품으로 눈을 돌린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7월부터 22일까지 발행된 ELB 규모는 10조 4642억 원으로, 전년 동기(7조 7224억 원)보다 약 36% 급증했다. ELB는 자금 대부분을 국공채 등 안전자산에 운용하면서 일부를 주가지수나 종목에 연동해 추가 수익을 노리는 구조로, 만기 시 원금을 보장받으면서도 조건에 따라 연 10% 수준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상반기에 주춤했던 ELD 투자도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코스피 지수가 높았던 지난 6월 국민·신한·하나·농협은행의 ELD 판매액은 7803억 원으로 감소했으나, 7월 이후에는 매달 1조 원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 중이다. 10월 역시 20일 만에 8000억 원을 넘어섰다. ELD는 코스피200 지수가 일정 상한선을 넘지 않을 경우 약속된 수익률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한편, 주가 하락을 매수 기회로 삼으려는 '빚투' 움직임도 포착된다. 5대 은행의 개인신용대출 잔액은 15일 기준 109조 7121억 원으로, 9월 말(108조 2303억 원)보다 1조 4818억 원 증가했다. 특히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44조 4546억 원을 기록하며 9월 말(42조 9834억 원) 대비 1조 4712억 원 늘어났는데, 이는 2022년 8월 이후 최대 규모다. 이는 주가 하락 시점에 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가 반영된 결과다.

다만 전문가들은 신중한 접근을 권고한다. 박상현 iM증권 애널리스트는 달러와 엔화의 환율 급락이 국내 주식시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향후 시장의 향방은 국내 반도체 수출의 핵심인 인공지능(AI) 사이클과 대외적인 불확실성이 얼마나 완화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