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송전망, 반도체 대박 꿈 가로막나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분야의 3대 메가프로젝트가 전력 공급 문제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핵심은 송전망 건설 속도다. 전문가들은 전력망 확충 속도를 현재보다 최소 6배 이상 끌어올려야만 적기 공급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8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는 국민경제자문회의와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이 주관하는 '전력망 병목, 에너지 지정학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공동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권효재 COR에너지인사이트 대표는 '메가프로젝트 전력 공급 및 송전망 확충 실행 전략'을 발표하며, 현행 체계와 재원 및 제도하에서는 반도체 팹과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확률이 0.1%에 불과하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권 대표는 지금까지의 성과와 비교했을 때 작업 속도를 7배에서 8배까지 앞당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13년 걸리는 송전선로, 3년 만에 수요 폭발
현재 정부의 메가프로젝트들이 요구하는 신규 전력 수요는 30GW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송전망 구축 속도는 매우 더딘 실정이다. 통상적으로 대규모 산업 시설은 가동 후 3~4년 내에 전력이 본격적으로 필요해지지만, 345kV급 송전선로를 하나 건설하는 데는 평균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특히 2030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하는 송전망 계획 중 약 70%가 여전히 착공조차 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이 문제로 지목됐다.
권 대표는 송전망 확충을 방해하는 네 가지 핵심 병목 현상으로 수요자 간의 조율 문제, 주민 수용성 확보, 재원 마련, 그리고 사업 우선순위 설정 등을 꼽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권 대표는 사업의 우선순위와 비용 분담 원칙을 반년 안에 확정하고, 36개월 이내에 착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전권을 부여받은 전담 조직을 구성하는 비상 실행체계를 제안했다.
전력계통 안정성 확보 위한 제도 개편 시급
송전망 건설 속도를 높이는 것만큼이나 전력계통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이규섭 서울대학교 전기정보학부 교수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 같은 대형 전력 수요 시설이 늘어남에 따라 발생하는 급격한 전력 사용량 변동이 전체 전력망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대규모 부하 시설의 동작 방식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며, 기존의 전력계통 관련 고시와 법률, 규정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규모 시설의 급작스러운 전력 사용 변화를 통제하고, 낙뢰나 고장 시에도 전력망에서 즉각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한국형 전력망 접속기준(Grid Code)'의 제정과 안정화 설비의 확충이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전문가들은 반도체와 AI 산업에 투입된 막대한 자본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려면, 송전망 건설을 가속화할 비상 계획과 안정적 공급을 위한 제도적 개선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