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키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29일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이 공동으로 개최한 ‘개인정보 피해 회복 절차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 제안’ 간담회에서 관련 법률 전문가들은 현행 제도가 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의 ‘버티기’에 무력해진 조정 절차

이날 간담회에는 쿠팡, 티빙, 듀오, SK텔레콤 등 대규모 정보 유출 사건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최호웅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김대윤 더드림 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최새얀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가 참석해 실태를 공유했다. 최호웅 변호사는 2,300만 명의 정보가 유출된 SK텔레콤 사건을 예로 들며 조정 제도의 한계를 지적했다. 최 변호사는 앞서 3,267명의 피해자를 위해 집단분쟁조정을 신청해 1인당 30만 원의 배상 결정을 받아냈으나, SK텔레콤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소송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조정 신청자 중 실제로 소송을 이어가겠다고 밝힌 인원은 485명에 불과했다. 결국 법원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더라도 대다수 피해자는 배상권에서 멀어지게 된다.

최 변호사는 기업이 시간을 끌수록 소송을 포기하는 인원이 늘어나는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그는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조정이나 소송 과정에서 기업이 버티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전략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판 지연술과 파편화된 소송의 한계

쿠팡의 정보 유출 피해자 2만여 명을 대리하는 이은우 변호사 역시 기업의 재판 지연 전술을 폭로했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쿠팡 측은 원고들이 실제 회원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 2만 명의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기업이 불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원고 측이 요청하는 자료는 제출하지 않는 등 각종 지연술을 통해 소송 수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사건이 여러 법원에 산발적으로 제기되면서 심리 속도가 제각각인 점도 문제로 지목됐다. 최호웅 변호사는 본인이 맡은 사건의 재판부가 다른 관련 사건의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며 변론을 무기한 연기한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여러 재판부가 어디서 위법성을 먼저 판단할지 지켜보는 ‘눈치 보기’식 상황이 지속되면서 재판이 지연될 위험이 크다고 설명했다.

근본적 해결책으로 제시된 ‘집단소송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안으로 ‘집단소송제’의 도입과 확대를 강력히 제안했다. 50명 이상의 피해자가 모여 승소할 경우,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피해자들도 자동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이 제도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대안으로 꾸준히 논의되어 왔으나, 기업 타격 우려 등으로 인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은우 변호사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기업이 재판을 지연시킬 동력이 상실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송의 속도와 관계없이 법적 효과가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기업은 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해서라도 소송에 성실히 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아울러 기업이 증거 자료 제출 요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방안과, 기업의 비협조로 인한 입증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소송 전 당사자 간 증거 공개를 의무화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등도 주요 개선책으로 논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