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메리트 사라진 미국 노동시장
연봉 인상을 위해 직장을 옮기는 것이 더 이상 최선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이직자와 잔류 근로자 사이의 임금 상승률 격차가 눈에 띄게 좁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채용 시장의 냉각 기조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모색하기보다 현재의 자리를 지키려는 이른바 ‘잡 허깅(Job Hugging)’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7일(현지 시각) 보도를 통해, 잦은 이직이 반드시 신속한 승진이나 높은 급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전했다. 오히려 한 조직에 꾸준히 머물며 쌓은 성과와 신뢰가 더 빠른 승진과 높은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과거 미국 노동시장에서는 경력 개발을 위해 회사를 자주 옮기는 ‘잡 호핑(Job Hopping)’이 유효한 전략으로 통했다. 더 나은 처우를 약속하는 기업으로 옮겨 몸값을 높이는 방식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기업 간 인력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며 이직을 통한 임금 상승 효과가 매우 컸다.
급격히 줄어든 이직 임금 상승률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이전과 판이하다. 급여관리업체 ADP가 공개한 지난 9월 임금 통계에 따르면, 이직자의 전년 대비 임금 상승률은 4.8%를 기록했다. 같은 시기 기존 직장에 남은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률은 3.0%로 나타나, 두 집단 간의 격차는 1.8%포인트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이직자의 임금 상승률 중간값이 16%에 달했던 2022년 4월과 비교하면 이직을 통한 보상 규모가 급격히 위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ADP의 자료에 따르면 건설업과 광업, 금융업 분야에서는 이직자의 임금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반면 IT 산업과 숙박·여가업 분야에서는 오히려 기존 직장에 머무는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률이 더 높게 집계되었다.
AI 위협과 고용 불안이 만든 '잡 허깅'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잡 허깅’ 현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잡 호핑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현재의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미국 경제매체 Inc.가 지난 23일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7%가 스스로를 ‘잡 허거(Job Hugger)’라고 정의했다.
특히 이들 중 70%는 향후 6개월 내에 인공지능(AI) 기술이 자신의 고용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위축된 채용 시장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현실적 우려가 이직을 주저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풀이된다.
실제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 노동통계국 자료를 보면 지난 7월 자발적 퇴사율은 1.9%를 기록했는데, 이는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2016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기업들이 채용과 해고를 동시에 줄이는 ‘저채용·저해고’ 기조를 유지함에 따라 근로자들 역시 현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채용 전문가 디팔리 비야스는 향후 단순한 이직보다는 개인의 전문성과 성과를 입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AI 프로젝트 수행 능력이나 예산 관리 역량, 그리고 구체적인 사업 성과처럼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역량이 향후 높은 보수를 결정하는 핵심 지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